[나희덕] 미친 소와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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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4-07 09:25 조회24,6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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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노인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새로운 악의 출현과 그 징후에 관한 영화다. 늙은 보안관 벨이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자장을 드리우고 있는 인물은 살인청부업자 안톤 시거다. “영혼을 결한 듯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들의 화신”이라는 한기욱의 표현처럼, 시거는 악의 실행자로서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의식도 없이 단호하고 냉철하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동기는 개인적 원한이나 순간적 충동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원칙이나 논리에 있다.
그런데 현실의 상식이나 도덕을 초월하는 이 원칙이라는 것이 철저히 우연성과 익명성에 기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자신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을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행위만 보더라도 시거의 살인 행각은 사이코틱하다. 모스의 아내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요?”라고 묻지만, 그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살인을 감행한다. 그것이 자기가 정한 게임의 룰이라는 듯, 무고한 사람들의 이마에 구멍을 내는 살인자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착잡했던 것도 악인의 이 낯선 표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서였다. 보안관 벨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범죄와의 싸움을 미쳐 날뛰는 소를 잡는 일에 비유한다. 벨은 소가 거세게 요동치는 바람에 소를 겨냥한 탄환이 튕겨나와 소 잡는 사람의 안구에 박혀버린 일화를 들며, 그것은 더는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 아니라 인간과 짐승의 대결이라고 비장하게 말한다.
과연 이것이 미국만의 현실일까.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흉악범죄들을 보면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범죄의 표적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옛날에 복면을 쓰고 집안에 침입한 강도는 차라리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엘리베이터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이 갑자기 성폭행범이나 살인범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평범한 시민의 얼굴 속에서 언제 짐승의 얼굴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우연성과 익명성이라는 토양 속에서 악인의 얼굴은 선인의 얼굴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폭력 범죄자에게 전자 팔찌를 채우자고도 하고, 경찰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한 사형이나 무기징역으로 처벌을 강화해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단속이나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도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익명의 범죄를 막아내기는 어렵다. 이제 우리가 의지해야 할 사람은 사건을 손쉽게 처리하려는 경찰이 아니라 남의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는 행인들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돈과 욕망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체념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극약 처방이라도 써볼 것인가. 당장 우리의 선택은 둘 중 하나처럼 보이지만,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미친 소 몇 마리만 잡으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인가. 그렇지 않다. 소들의 광기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먹는 풀과 공기와 물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에 대한 사회적 반성과 치유 없이는 우리 자신이 언제라도 미친 소가 되거나 그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익명화된 사회 속에서 자폐적이고 병적인 공격성을 키워온 개인, 이것이 현대문명이 양산해낸 인간형이다. 문명의 광적인 질주에 대한 돌이킴 없이는 누구도 새로운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코언 형제의 묵시록적인 전언은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임박한 현실이다. 여기에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물론 어린이를 위한 나라도 없다.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겨레 2008.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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