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돌봄이 나를 호출했다' : 영 케어러와 돌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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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9-28 16:39 조회4,9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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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1인 가구의 돌봄 이슈에 대한 강의를 부탁받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갑자기 돌봄자로 호출된 20대 초반 청년들의 절망이었다. 사적으로 듣게 된 사례들도, '새파란 돌봄'(조기현)을 비롯해 여러 책에서 알게 된 사례들도 한결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황을 가리켰다. 이 정황 속에서 '돌봄 윤리'는 사적 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정치의 문제로 부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둘이서만 살며 성장한 아들이 22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다. 응급 수술을 마치고 난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 즉 절대적 돌봄 의존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편마비로 인한 와상 상태에 콧줄을 사용한 영양 공급, 소변줄과 기저귀 케어, 욕창 방지를 위해 2시간마다 자세 바꿔 주기 – 이 전면적 돌봄의 핵심은, 돌봄 의존자가 사망하지 않는 한 돌봄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하기까지 가파르게 흐른 절망의 시간을 정리하면 이렇다. 2020년 9월 13일 쓰러짐. 응급 수술. 2021년 4월 23일 마지막 병원에서 퇴원. 5월 8일 시신으로 발견. 2022년 3월 31일 아들이 존속살인의 죄명으로 4년형을 선고받음.
이 사건을 깊이 탐사한 한 매체에 따르면, 아버지의 퇴원과 사망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퇴원 후 1주일쯤 지나, 아버지가 말한다. '미안하다.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를 테니까, 그전에는 아버지 방에 들어오지 마라.' 5월 3일쯤 아들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아버지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울다가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온다. 8일에 다시 방문을 연 아들은 아버지 사망을 확인한다.
이 압축 장면을 풀면 한 편의 사회극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비통한 장면 앞에서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 2년 6개월 만에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을 집어삼킨 이 사건은 사회면 한 귀퉁이를 잠깐 차지했다가 곧 잊힐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돌봄 위기'의 총체성이 날것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가 '저지른 범죄'가 유기치사냐, 존속살해냐를 두고 의견이 갈라질 때, 법정에 소환된 그가 한 말이 살인 의도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더 이상 이렇게 돌보면서 내가 살기는 힘들고, 돌본다고 해도 아버지께서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는 그의 말은 그러나 살인 '의도'를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처한 돌봄 위기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쓰러졌어도 어느 정도 경제적·사회적 자원이 있었다면, 돌봄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22세이면 어느 정도 돌봄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돌봄 교육과 훈련이 있었다면, 포괄적인 돌봄 문화가 있었다면, 모든 시민을 돌봄 위기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제대로 '보호'하는 정책이 있었다면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비정한 아들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법원은 그가 '미숙한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에서 정작 '미숙한 판단'은 누구의 몫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돌봄이 영(어덜트)케어러를 호출할 때, 그가 철저하게 홀로인 상태에서 이 돌봄에 내던져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돌봄 윤리가 아니라, 그때까지 계속 미숙한 판단과 유예만을 거듭해온 시민사회와 국가가 응답해야 할 돌봄 정치의 문제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한국일보 2022년 09월 05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90511210004562?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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