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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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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11-07 15:22 조회4,7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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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경북 성주 소성리를 다녀왔다. 박근혜 정권 때, 성주 성산의 방공포대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발표가 난 후 몇 번 성주읍에서 있었던 집회에 참석했지만, 그 현장이 소성리로 옮겨진 이후로는 가보지 못했다. 막 소성리에 도착하자 나를 조롱하자는 것인지 커다란 수송 헬기가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불법적으로’ 사드가 배치된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사드가 ‘북한의 위협’에 대한 것이라는 거짓말이 ‘참말’로 뒤바뀐 상황에서 소성리가 너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있었지만, 변명하자면 소성리는 산골 마을이라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외부인(?)이었다. 

전쟁 위협 높인 사드, 떠나야 맞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며칠 전에 사드 기지에 물자 반입을 한다고 진밭교에서 한바탕 씨름이 있었지만, 내가 도착해서 느낀 소성리는, 사드만 없다면 평화 그 자체인 농촌 마을이었다. 진밭교를 지키는 경찰은 더 이상의 진입은 불가하다고 막아섰다. 그 위로 올라가 본들 큰 의미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한번 찔러보면 국가권력에 대한 ‘실감’이 미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국가권력의 폭력성은 언제나 막무가내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강정에서도, 밀양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그 폭력의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욱식이 <사드의 모든 것>(유리창, 2017)에서 밝혔듯이 사드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세우는 것은 ‘북한의 위협’인데, 이 국제정치적 클리셰는 지금도 여전하고 아마 우리가 분단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정욱식에 의하면 방어용 미사일 체계로서의 사드는 ‘북한의 위협’에 거의 무용지물이다. 사드의 최고 사거리는 200㎞이고 요격 고도는 40㎞에서 150㎞ 사이인데 만일 북한이 미사일 발사 각도를 조절해 40㎞ 아래로 쏘거나 150㎞ 위로 발사하면 소용없는 물건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실제 요격률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 정부는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성주에 사드를 배치한다고 할 때 중국이 강력 반발하고 지금도 여전한 외교 문제인 것은 사드가 X-밴드레이더를 통해 중국의 본토까지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사드가 유효한 미사일 체계라고 해도, 갈수록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 상황을 고려할 때 적(?)을 자극하는 무기를 들이는 일 자체가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군비 증강은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군사적 긴장을 높일 뿐인데, 마당에 인화물질을 가득 쌓아놓으면 그러지 않을 때보다 폭발이나 화재가 날 가능성이 크게 늘어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안전사고를 예방하려면 재해를 일으킬 원인을 미리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간단한 원리를 무시하는 사드 배치가 전쟁 가능성만 높이는 행위임은 누차 지적되었지만 이는 간단히 무시당했다.

‘평화 지킴’은 폭력적 국가 언어 

소성리에서 만난 강형구 예수살이 소성리 지킴이는, 우리에게 일어날 전쟁을 상상해보자고 권유했다. 잔인한 언어 같지만, 전쟁을 막겠다는 각자의 발심은 전쟁을 심정적으로 멀리하지 않고 대신 상상하는 데서 가능할지도 모른다. 죽음을 의식하고 상상하는 것이 도리어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면서 전쟁 위협을 높이는 무기 도입은 용인하는 우리의 정신 상태는 확실히 분열적이다. 전쟁을 상상하기 괴로우면 사드는 떠나야 맞다. 더군다나 한·미·일이 동해상에서 군사훈련을 하자 북한은 연달아 미사일을 쏘아대고 전투기가 출격하며, 포 사격을 했다.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은 우발적 사건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 국가가 본래 폭력에 기반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적으로 말해, 평화는 지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는 것’이다. 평화를 지킨다는 언어에는 어쩐지 화약 냄새가 나며 평화의 본질을 은폐하는 음험함이 배어 있다. 평화를 지킨다는 언어는 타자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할 때만 성립 가능한 명제다. 우리 사회뿐만이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근의 일들은 우리에게 깊은 위기감을 주며, 이 위기감의 지속은 개개인의 마음과 영혼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불안과 공포에 지배될수록 타자에 대한 폭력은 증폭돼서 나타난다. 즉 불안과 공포를 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평화인 것이다. ‘평화를 지킨다’는 폭력적인 국가의 언어이고 ‘평화를 산다’는 민중의 언어다. 소성리에 있는 자그마한 책방 외벽에, “평화한 마음을 놓지 말라. 평화를 먼 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내 마음 가운데서 먼저 구하라”는 원불교 2대 종법사 정산 종사 송규의 법어가 걸려 있었다. 소성리는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기도 하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2년 10월 24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02403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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