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진실과 거짓, 옮음과 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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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12-07 14:55 조회4,90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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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해럴드 핀터는 1958년 자신의 노트에 쓴 한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재와 실재하지 않는 것, 진실과 거짓은 명확한 구분이 없다. 어떤 사물이 반드시 진실이거나 거짓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진실인 동시에 거짓일 수도 있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내포된 심오한 진리를 말하는 듯하다. 고양된 높이의 정신 수준에 있는 현자가 지혜의 금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기실은 특별한 전문적 공부나 훈련을 거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삶의 경험으로 느낄 수 있는 현상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보면 수긍할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일 터이다.
순간 당혹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세상 모든 일에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없다는 말인가? 옳고 그름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라는 말인가? 당장 우리가 부정적 사회 현상으로 지목하여 추방 운동을 벌이고 있는 가짜뉴스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진짜도 가짜처럼 허망하고, 가짜도 진짜와 동등한 가치와 지위를 누려도 좋다는 말인가?
사실은 실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도 사실의 일부다. 그때 행위자의 생각은 사실인가, 아닌가? 벌써 모호해진다. 드러난 것만 사실인가? 행위자의 의도를 배제하고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가? 행위라는 사실을 해석하는 데 행위자 의사의 확인이나 추측은 필수요건이다. 그렇다면 드러나지 않는 것도 사실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사실 확정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다.
한 사람의 행위가 그 자체로 아무 문제 없다면, 그것은 부정되지 않는다. 허용된 자유로운 행위가 몇 개 병렬적으로 존재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가 모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새로운 차원에 도달한다.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아무렇지도 않던 행위가 거대해지면 혁명적 힘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그때는 극도로 긍정적 평가의 대상으로 부상한다. 그런가 하면 유사한 크기의 행위라도 다른 형태로 발현되면 참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원인의 책임을 규명하기 위해서 정치적 행동이 법의 이름으로 작동한다.
옳고 그름이 존재해야 하고
옳음을 추구하여 행동해야 하지만
내가 옳다 판단한 다른 편엔
다른 옳음 있다는 사실 인정해야
긍정적으로 보이는 행위의 집합은 옳은 것으로 평가되고, 부정적으로 비치는 행위의 집합은 그른 것으로 지적된다. 특정한 사실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드러나 구분되는 현상을 실재로 받아들인다. 이때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진실과 거짓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에서는 옳은 것을 진실에, 그른 것을 거짓에 대응시키기도 한다. 사실에는 옳고 그름이나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존재에서 당위가 도출되느냐라는 법철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사실을 두고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어려울지 모르나, 진실이나 거짓은 사실이다. 사실에서 진실과 거짓의 구분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핀터의 메모장에는 앞에서 인용한 부분에 이어 바로 이런 구절이 나타난다. “나는 이 주장이 아직도 맞는 이야기이고, 예술을 통해 실재를 탐험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로서는 이를 지지한다. 그러나 시민으로서는 이를 지지할 수 없다. 시민으로서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질문해야 한다.”
다소 위안이 되는 결론이다. 그래야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 자유방임적 사고와 허무적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길을 발견한다. 옳고 그름이 존재해야 하고, 옳음을 추구하여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그것이 언제나 유일한 옳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판단한 다른 편에는 다른 옳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웬만하면 내가 선택한 옳음에 모든 것을 거는 식의 과도한 용기는 자제하는 편이 현명하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법률신문 2022년 11월 10일
https://www.lawtimes.co.kr/Legal-Opinion/Legal-Opinion-View?serial=18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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