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 평상(平床)의 공동체, 우리 사회의 세계시민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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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10-01 17:23 조회7,2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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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륵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 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 번이나 돋구고 흥게닭이 멫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리오도록 잔다
- 백석의 <여우난골족> 부분
집 앞을 나서면서 윗집 아랫집 인사하며 아침을 맞이하는 동네. 골목 어귀로 나서면 지나는 사람마다 하나하나 반가운 얼굴들이 맞이하는 풍경. 한여름에 골목에 평상이라도 펼쳐놓으면 이집 저집에서 하나씩 나온 사람들이 털썩 주저앉아 해가 어둑해질 때까지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저녁시간이면 이집 저집 오가는 반찬들이 정겨운 곳. 밤새 내남없이 함께 흥성거려도 도무지 책잡을 사람 하나 없이 정겨운 그곳.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마을의 이미지는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인에게 그것은 추억 속에서나 끄집어내야 하는 이름이 된 지 오래다. 이미 1935년, 백석이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장소 여우난골을, 그의 시에서 시리도록 그리운 마음으로 담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마을이란 여러 집이 한데 모여서 사는 취락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곳을 마을이라고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집 한 집의 삶이 이웃과 서로 긴밀하게 소통하고, 그로 인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사람이 하나의 생활군으로 묶이고, 더 나아가 깊은 교감과 연대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곳을 마을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마을이라면, 우리 도시인에게 마을은 이미 오래 전에 상실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우리가 꿈꾸는 마을의 모습은 우리의 주변이 아닌 미디어를 통해서만 확인된다. 수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온 쌍문동을 떠올려 보라.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대문을 마주하고 살았던 다섯 친구는 인정 많고 따뜻한 마을 사람들 보살핌 속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자료1. [응답하라 1988] 화면캡처. 출처: tvN
길과 집이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이룬 쌍문동 어느 마을의 풍경은, 조금만 확장해 보면 언뜻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가 제안했던 팔랑스테르라는 유토피아가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파란 하늘까지 골목의 전경을 이루고 있는 쌍문동의 골목은 아케이드로 구성된 팔랑스테르가 아니다. 더구나 완벽하게 상부상조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생활공동체로서 팔랑스테르가 그저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본질만큼은 어쩐지 통하는 것 같다.
이처럼 <응답하라 1988>의 세계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래서 기억 속에 박제된 모든 이의 ‘어느 마지막 순간’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세대를 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폭넓은 공감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도시인은 이미 오래 전에 마을을 잃어버렸고, 그보다 더 어린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을을 아예 가져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마을의 사전적 정의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것은 오늘의 우리 삶과 크게 접점을 이루지 않는다.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은 그들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쌍문동에서 보냈다. 그리고 쌍문동은 그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이미 쌍문동 시절이 하나의 추억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의미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원형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어쩌면 거짓말이다. 그토록 따뜻하고 안온했던 장소를 떠난 것은 그 무엇보다 그들의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이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쌍문동의 서사는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떠올려 보라. 너무나 정겨웠던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그 마을의 주인들이었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슬프게도 성장과 개발의 논리였다. 무엇보다 쌍문동 가족들 모두가 아파트로 떠난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부동산 불패신화’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그들은 아파트라는 보다 현실적인 투자를 위해 쌍문동에서 이루었던 공동체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도, 여전히 마을일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 이 모두는 우리 모두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벌써 좌절하기엔 이르다. 또 다른 드라마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바로 2021년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이다. 2004년 상영된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비밀스러운 주인공 홍반장의 모습과 함께, 사람 사는 내음으로 가득한 바닷가 마을 ‘공진’을 통해 아주 특별한 마을공동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자료2. [갯마을 차차차]와 [응답하라 1988] 화면캡처. 출처: tvN
특별한 약속 없이도 두런두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지 낯익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상투적인 장면이다. 살기 좋은 마을을 그려낸 드라마라면 빠지지 않고 꼭 나오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응답하라 1988>를 다시 떠올려 보라. 공진의 슈퍼 모습에서 쌍문동의 80년대 풍경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이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원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볼만한 것은 ‘평상’의 존재이다. 평상이란 나무를 사용하여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만들 전통가구이다. 주로 뜰이나 마당에 놓아 사람이 주로 걸터앉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평상이 거리에 놓인다는 것은 결코 그 의미가 소소하지 않다.
공공성과 공동체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공동체가 닫힌 영역을 형성하는 데 반해서, 공공성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공공성은 독일어로 ‘Öffentlichkeit’라고 표현되는데, 그 어원은 ‘열려 있다’는 의미의 ‘often’이다. 열려 있다는 것, 폐쇄된 영역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공공성의 조건이다. ‘바깥’을 형상화함으로써 ‘안’을 형상화하는 공동체에는 이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역, 이음, 2009, 27-28쪽
우리는 종종 공동체라는 개념을 굉장히 이상화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이토 준이치의 지적대로 공동체는 때때로 지극히 닫힌 영역을 형성하는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공공성은 공동체라는 개념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런데 평상이 가진 의미망으로 가면 이러한 구분은 무력해진다. 한국적 공동체의 풍경을 담아내는 중요한 소품이자 작은 장소로서 평상은, 놀랍게도 공동체 안에서 공공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평상은 누구나에게 허락된 자리임을 의미한다. 그 앞을 지나가는 누구라도 굳이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자리, 그 누구에게도 열려 있는 장소. 그것은 다름 아닌 공공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오늘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싶다. 그것은 문화적·일상적으로 동질한 성격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문화와의 소통에 열려 있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지닌 연대로서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미디어 속에 그려진 마을공동체가 지구촌이라는 가치로 확장될 수 있다면, 때때로 공허하게 느껴지는 세계시민성이라는 말 역시 좀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세계시민으로서 우리의 목표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저 누구나 잠시 함께 쉴 수 있는 평상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특별기여자를 한국으로 맞이한 미라클 작전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마을을, 그리고 공동체를 더 이상 추억의 것으로 묵힐 필요가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용기일지도 모른다. 대문 밖에 평상 하나 펼칠 수 있는 그 용기 말이다. 그저 평상 하나 펼쳤을 뿐인데, 마을은 이토록 가깝게 다가온다. 그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세계가 우리 안으로 더 가깝게 다가온다. 이 ‘평상(平床)의 공동체’를 통해 세계시민으로서 성숙을 꿈꾸어 본다.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1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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