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놀람과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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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3-14 17:28 조회5,8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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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 시절의 일이다. ‘4대강 사업’이 한창일 때 마을 앞에 흐르는 강이 구슬피 우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의 내용인즉슨, 시골집에 내려가 잠을 자다 꾼 꿈에서 강이 흐느껴 우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나오자 강이 우는 소리가 허공에 가득했다. 마침 뒤안에서 나오는 어머니께, 누가 저렇게 울어요? 물었더니, 작년 이맘때 물에 빠져 죽은 동네 양반이 안 있더냐, 하고 말씀하셨다. 북받치는 슬픔에 잠에서 깬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용은 다르지만, 어릴 적에 같은 마을에 살던 여자아이가 강가에서 우는 꿈을 한 번 더 꿨다. 그 꿈에서는 멀리 하류에서 포클레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꿈들을 어릴 때 직접 겪었던 일과 몸에 각인되었던 강에 대한 감각이 깊은 데서 웅크리고 있다가 ‘4대강 사업’과 뒤얽혀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오래전에 꾼 꿈이 새삼 떠오른 것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4대강 사업을 계승하겠다는 발언을 하고 나서인데 처음에는 다소 멍한 상태로 받아들였다. 나 자신도 바쁜 생활 때문에 강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어제오늘 일이 아닌 현실 정치인들의 구태에 언제부터인가 분노의 감정도 아깝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계승’하겠다면 추가로 더 삽질을 하겠다는 뜻인가? 나에게는 최소한 그렇게 들렸다. 이러한 구태들이 선거 때만 되면 여전히 떠들썩한 것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이번 대선에도 너도나도 개발과 경제성장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4대강 사업을 ‘계승’하겠다는 공약이 차라리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대한 근대문명의 폭력적인 행동과 언어의 대가로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을 혹독하게 앓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무언가 한참 부족해 보인다.
새싹 부를 봄볕이 우리에게 있을까
철학은 ‘놀람’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지만 시는 ‘설렘’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놀람과 설렘 사이에 그렇게 먼 거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놀람은 설렘을 불러일으키고 설렘이 놀람을 동반하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경험적으로 느껴본 적이 있거나 또는 느끼면서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람이나 설렘은 곧잘 일상에 가려지기도 하고 국가나 자본이 기획하는 ‘충격과 공포’에 의해 일그러지기도 한다. 일테면 ‘4대강 사업’ 같은 국가의 정책이나 자본이 주장하는 혁신 같은 것들은 우리들을 비상하게 긴장시켜서 놀람이나 설렘이 아니라 우울과 스트레스를 준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도생이라는 탐욕으로 우리를 이르게도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게 우리가 사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람과 설렘이라는 생명 본연의 현상은 현실의 고통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와중에도 ‘봄볕’이 부르면 언제고 새싹을 내밀 힘을 간직한다. 중요한 것은 이 놀람과 설렘을 우리 자신이 믿는 일인데, 문제는 우리에게 지금 ‘봄볕’이 있느냐는 점이다.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바로 개발과 경제성장에 대한 탐욕이다. 정치가 탐욕을 자극하는 것인지 평소에 쌓인 탐욕이 선거라는 기회를 틈타 고개를 내미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탐욕이 탐욕을 낳고 양육하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놀람을 만나고 설렘을 갖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도리어 놀람을 선사하고 설렘을 전파해야 할 사람들이 화려한 욕망의 잔칫상에 초대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코로나가 괜히 온 게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욕망의 잔칫상을 엎지 못하면 다음에는 마스크가 아니라 방독면을 쓰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혹 그 상황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탐욕 걷어내야 놀람과 설렘의 길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탐욕에게 감금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길은 탐욕을 걷어내는 만큼 드러날 텐데, 탐욕이 무거운지 지레 주저앉는다. 주저앉을 바에 기왕이면 문화적인 포즈까지 걸치면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래서 모든 문화가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탐욕을 걷어내는 일은 금욕적 절제만으로는 어렵다. 그것은 김수영의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는 담대한 발상처럼 우리 안에 봄볕이 자라는 기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놀람과 설렘은 살아 있는 목숨에 대한 동경과 경외의 감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감정의 충만이 새싹을 가리는 욕망의 잔칫상을 뒤엎는 실천을 부르기도 한다. 생명은 언제 어디서나 약동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가리는 것들을 치워주는 게 설렘으로서의 시의 일이라는 믿음을 다독다독 가슴에 묻으며 오늘은 봄이 오는 길을 걸어야겠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2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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