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우리의 봄은 여전히 아프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4-04 15:54 조회5,88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아파트 단지 내 나무들을 전지 작업을 통해 말뚝처럼 만드는 것을 보고 항의하면 대략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주차해놓은 차에 손상을 입히기도 하고 또 태풍이라도 불면 피해가 있습니다. 그런 사고가 대체 얼마나 있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우물쭈물한다. 굳이 그러한 이유라면 나무들을 뽑아버리는 게 나을 거라고 내가 좀 이죽거리고는 했다. 어린이 놀이터 주위에 있는 제법 큰 나무들 가지를 칠 때는 시청 공원녹지과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나뭇가지가 떨어지면 아이들이 다치기도 하니 ‘쓸모없는’ 가지들을 쳐내는 것이라고 했다. 만일 그게 걱정이라면 지난겨울에 삭정이를 다듬어줘야지 왜 여름이 다가오는 시간에 그러느냐고 되묻자 그때야 사과하고 일단 멈추겠다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나무가 흉기나 쓸모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가을에 떨어지는 은행 냄새가 싫으니 은행나무를 베자 하고, 지나가다가 떨어지는 감에 맞았다고 감나무를 베자고 한다.
오늘 출근하면서 보니 그렇게 잘려 나갔던 나무들에서 꽃망울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는데 굵직한 몸통에서 새로 자란 가지들이 봉두난발처럼 어수선했다. 큰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들의 모습은 이렇게 어슷비슷하다. 세련되기 힘들고 어떤 때는 야만스럽게 보이기도 하는데, 본시 생명의 힘은 합리적이거나 온순하지 않은 법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일 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몰골이 거칠어보일 수 있으나 그런 존재들에게도 웃음의 힘은 있어서 불구 같은 몸을 가지고도 눈부신 꽃망울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괜히 고맙고 신기해 잠깐 바쁜 발길을 멈췄다. 기후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땅속에는 깊은 꿈을 꾸게 하는 숨결들이 가득하구나 하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갈라쳐 ‘무사유의 사회’로 끌고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말들이 요즘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순환선 2호선은 후폭풍이 두려워서 못 건드리고” “4호선 노원, 도봉, 강북, 성북 주민과 3호선 고양, 은평, 서대문 등의 서민 거주지역”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며 장애인 활동가들의 시위를 비판하는가 하면, 심지어 장애인 활동가들의 과격한(?) 시위를 ‘비문명적’이라고 부르며 ‘선량한’ 시민의 대척점에 놓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이런 비판은 지난주 내내 계속되었고,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평소에 이 대표의 언어를 접할 때마다 그 매끄러움에 감탄하고는 하는데, 나처럼 언어에 예민한 사람마저 그렇다면 먹고살기에 바쁜 시민들 중 일부 ‘선량한’ 사람들이 이 대표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현상이다.
그는 노원 지역에서 세 번 출마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아직 원외인) 자신의 지역구 정치를 위해 장애인 활동가들의 시위를 이용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순환선 2호선은 후폭풍이 두려워서 못 건드리고” 같은 발언에서 다소간 감지되는데, 이 언어에는 자신이 출마했던 지역 주민들을 심리적으로 묶어두는 효과가 있다. 이 대표의 언어가 정작 문제적인 것은 이 대목인데, 자신의 권력 욕망을 위한 정치적 교언은 시민들을 감정적으로 갈라놓으면서 입장의 찬반을 떠나 우리 사회를 무사유의 사회로 이끌고 간다는 점이다.
‘장애’란 무엇인가? 철학자 고병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영역에서 어떤 행위·활동을 할 수 없는 한계에 마주할 때 우리는 ‘할 수 없음(disability)’을 경험하게 되며 바로 이것이 ‘장애(disability)’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무능 상태에 빠진다. 심지어 인생의 특정 시기 전체가 그 상태일 수 있다. 한편으로 무능 상태는 사회적·문화적으로 강제되기도 하며 그래서 우리에게는 누구나 ‘서로 돌봄’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서로 돌봄’ 없이 무능 상태를 ‘쓸모없음’으로 치부하고 배제하는 세상이라면, 이 대표 자신에게도 언제 그러한 시간이 도래할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은 장애인 운동단체의 투쟁 방식을 문제 삼은 것이라 하지만 장애인 활동가들이 시민들을 ‘인질’로 잡아두는 이들이라는 편견을 퍼뜨렸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인질’이라는 말 자체가 형사 언어인데 그것을 사유하지 않은 결과이다.
‘쓸모없음’ 분류권 누구에게도 없어
그런데 우리의 무의식을 뒤덮고 있는 공리적이고 경제주의적 사고가, ‘쓸모없음’을 계속 개발하면서 배제하는 근본 동인인 것은 아닐까. 나무든 사람이든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존재를 ‘쓸모없음’으로 분류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며, 도리어 그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존재’를 더 풍요롭게 하는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이번에 새삼 확인했는데, 이 나라 정치가들은 별로 느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의 봄은 여전히 아프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2년 4월 4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40403000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