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갈 수 있는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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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8-01 17:27 조회4,8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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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초 어느 밤, 한달살이 하던 제주의 숙소, 게스트들이 숨죽이고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었다. 누나 역의 은혜씨가 대사를 잊으면, 상대역인 아버지가 “누나도 연애하고 싶어요?” 하고 다시 시작했다. 연습이 이어지고 밤이 깊어갔다. 드라마는 이듬해 봄에 공개된다고 했다. 그녀의 출연은 비밀이니 함구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근사한 비밀이 생겼다.
그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꽤 화제가 됐다. 드라마 속 저 이야기도 그랬다. 발달장애인 영희는 서울의 장애인거주시설에 산다. 유일한 혈육은 쌍둥이 동생 영옥이다. 영희의 존재를 아는 순간 남자들이 떠난다. 천형 같은 돌봄의 굴레를 벗어나려 제주로 온 영옥에게 따뜻한 연하남 정준이 다가오지만 영옥은 냉소한다. “너도 결국 떠나겠지.” 찾지 않는 영옥에게 분노한 영희가 제주로 찾아온다. 그리고 동생의 연인 앞에서 말한다. 나도 너희처럼 욕망이 있는 인간이라고. 정준이 영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영옥도 정준을 받아들인다. 모두의 처지가 납득된다. 드라마는 희망을 그린다. 숙제도 남긴 채.
그 숙제 이야기를 해보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역사 시위가 큰 논란이 됐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최대 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해야 본인들의 주장이 관철된다는 비문명적 관점으로 불법시위를 지속한다”고 비난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그를 지지하는 청년남성들이 장애인 시위에 가장 비판적이라는 조사결과도 있었다.
휠체어 타고 남대문시장에 액세서리를 납품하던 김순석이 제발 거리의 턱을 없애 달라며 목숨을 끊은 때가 1984년이다. 지하철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망사고 뒤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자”며 이동권 투쟁에 나선 게 2001년이다. 김순석으로부터 38년, 이동권 투쟁으로부터 21년이 지났다. 올해 1월 마침내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런데 예산 편성을 의무화하지 않았다. 눈 가리고 아웅 한 셈이다. 장애인들이 분노한 이유다. 출근길이 늦어지면 화나는 건 인지상정이다. 수십년 싸움의 사정을 알고 나면 미안해지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책임이 지대한 거대정당 대표가 오히려 장애인을 공격하다니 후안무치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예전보다는 꽤 나아진 것 아니냐고도 한다. ‘턱’의 사례만 보자.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 의해 공중이용시설에 경사로와 점자표기가 의무화된 게 1997년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1998년 이전에 건축됐거나 300㎡(90평) 이하 건축물은 의무사항이 아니다. 생활편의시설의 90% 이상이 300㎡ 이하다. 즉 대부분 의무가 없다. 장애인들이 악착같이 싸워서 올해 4월 시행령이 개정됐다. 면적기준이 50㎡(15평)로 낮아진 것. 편의점 같은 소형시설은 여전히 예외다. 무엇보다 신축건물만 해당된다. 늘 이런 식이다. 턱 없애기조차 이렇게 한없이 지연된다. 턱이 얼마나 높은 장벽인지 경험도, 공감도 해보지 못한 이들끼리 이만하면 꽤 좋아진 것 아니냐며 자찬한다.
드라마 속 영희가 사는 시설은 인간적이다. 거리의 철학자 고병권이 인터뷰한 시설 거주 장애인도 말한다, “이곳은 정말 자유롭다”고. 하지만 마당 벤치에 한번도 혼자서 앉아본 적이 없다. 장애인 활동가 출신 지인이 며칠 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남성 비장애인에게 군대 다시 가는 꿈이 악몽이라면 나에겐 시설에서 사는 꿈이 악몽이다. 어젯밤은 진짜 최악이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탈출한 지 12년이 된 지금도 종종 시설 악몽을 꾼단다. 오늘날 18개월 군복무는 세상에 대한 청년남성들의 원한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군대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면 된다는 말에는 화가 치민다. 그런다고 가고 싶어질 리가 없다. 바로 그 심정으로 기약없이 시설에 갇힌 장애인을 헤아려보자. 당신들이 화낼 대상은 장애인이 아니다.
막상 장애인의 부모들이 탈시설 지원 입법을 반대한다고도 한다. 드라마 속 영옥의 가슴에 내려앉은 돌덩이를 생각하면 공감이 되고도 남는다. 가족에게 책임을 떠넘기니 그럴 수밖에.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선택권의 자유를 가지며 특정한 거주형태에서 살도록 강요받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장애인의 자립과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결합되는 수밖에 없다.
드라마 속 영희는 ‘삼춘’들의 얼굴을 그려서 선물한다. 정은혜 작가는 얼굴을 그리는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다른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판매’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한 대가로 급여를 받는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시범사업 중인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의 일환이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된 것이 1990년이지만 아직도 시혜적 조치에 머물고 있다. 중증장애인 일자리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장애인 활동가 설요한씨가 실적 압박에 목숨을 끊은 때가 2019년이다. 실적과 효율 대신 권리중심 노동이라는 접근을 제기한 이유다. 권리중심 노동이란 어떤 것일까? 저상버스 필요성을 알리는 팻말을 목에 걸고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준다. 소외계층의 인권을 노래와 춤 공연으로 호소한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을 알린다. 그림도 그린다. 그들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바로 권리를, 권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생산한다. 그만큼 세상이 나아진다.
근대를 대표하는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모두 이런 노동은 효용도, 가치도 생산하지 못하는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하곤 하는 금융산업 종사자들이 받는 엄청난 대가를 생각하면, 장애인의 권리중심 노동이 훨씬 가치있게 여겨진다. 권리중심 노동 접근은 사회구성원의 정신적·물질적 삶의 증진에 기여하는 모든 활동이 가치있다고 간주한다. 가사노동, 돌봄노동도 마찬가지다. 자본에 봉사하지 않아도 노동은 이렇게 가치롭다. 장애인 노동의 가치 재평가를 통해 노동의 가치 자체에 대한 완고한 고정관념을 넘어서게 된다.
근래 몇년간 한국의 장애인복지 예산은 꽤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나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 됐다. 우리의 현주소다.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이 소진된 세상이라고 한다. 유토피아가 어떤 곳일지는 잘 모르겠다. 장애인이 살기 좋다면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란 건 알겠다. 우리의 삶과 노동이 더욱 존엄해진다. 그곳이 유토피아다. 우리가 갈 수 있는.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2년 7월 19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515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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