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정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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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2-14 17:43 조회6,0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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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은 ‘역사철학 테제’로 알려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쓰기 위한 메모에 요즘 널리 회자되는 말을 남겼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지만 현실을 보건대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말의 자세한 뜻을 이해하려면 일단 히틀러와 스탈린이 맺은 독·소 불가침조약이 그 역사적 배경임을 알아야 한다. 베냐민은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손잡은 사건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에 대한 응전으로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에는 “‘비상상태’가 상례”인데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에 상례적으로 있어온 ‘비상사태’를 억압하는 자들의 시간을 폭파시키는 개념으로 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베냐민의 생각은 단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돌출된 정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독일의 혁명 세력이 사회민주주의로 퇴행을 거듭해온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면서 이 퇴행이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실을 직격했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이다.”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진보는 단적으로 말해, “자연 지배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 노동에 대한 경제적 관점이었다.
백무산 시인은 ‘창작과 비평’ 2020년 여름호의 ‘작가조명’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영원한 노동시인’으로 부르는 현실을 담담히 술회했다. 그동안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이 존재를 어떻게 파괴하고 폐기처분했는지에 대해서 그치지 않는 사유를 진행시켰던 사실에 비춰 보면 어색하지 않은 호명이기는 하다. 하지만 백무산 시인을 ‘영원한 노동시인’이라 부를 때는 단지 보다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한 시적 싸움을 벌였다는 협소한 시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의 울림
2020년 봄에 펴낸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에는 쓰라린 시인의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그 시집에 실린 ‘그때가 좋았지’라는 작품에서 친구의 병문안을 간 시의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맞아 그땐 분명히 그랬어/ 그땐 이처럼 버려지진 않았으니까/ 그땐 이처럼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영혼이 암전되어 버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런데 이 ‘영원한 노동시인’은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그의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때부터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만국의 노동자여>에 실린 적잖은 작품들이 대지에서 추방당한 존재들의 노래지만 노동자 계급적 관점에서 쓴 뛰어난 작품들 때문에 시인의 근원적인 그리움이 가려지고는 했다. 하지만 첫 시집에 실린 ‘해방공단 가는 길·3’에는 시인의 마음 가장 아래에서 올라오는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시인은 “진정 해방된 일터”는 “더 좋은 봉급”이나 “더 짧은 노동시간”, “덜 거친 일터”도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는 바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이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의 깊은 의미를 알려면 제법 긴 글이 필요하지만, 일단 작품에 대한 문학적 해석을 떠나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이 주는 울림은 지금도 작지 않다. 어쩌면 백무산 시인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을 찾아 그동안 시를 써왔는지도 모르겠다.
기후위기 문제를 급부상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그 질문의 의미를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몸과 마음이 적잖이 지쳐서인지 우리는 지금 막연한 일상의 회복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더는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태도와 언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의 일상으로 복귀한다고 해도, 또는 무거운 질문은 더 받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꽃은 멈춤의 힘으로 핌’을 알아야
압도적인 영상 문화의 버캐를 걷어내고 마주하는 우리의 진짜 현실은 이제 그만 멈추라는 살아 있는 목숨들의 절규이다. 그런데 무엇을 멈추라는 것일까? 그동안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절제가 마비된 해외여행, 이유도 잘 모르는 공항 건설과 멈추지 않는 핵발전소, 산천을 파괴하며 늘어나는 자동차 도로, 벼 대신 태양광 패널을 심는 논, 일을 하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게 되어 있는 산업 문명 자체를 멈추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더 많은 이윤과 더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경제성장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다. 지금 당장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지 않으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땅”은 우리에게 결코 도래하지 않으며 지금처럼 우리 자신이 쓰레기가 되는 현실은 계속될 것이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정지의 힘’)
황규관 시인
출처: 경향신문 2022년 2월 7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20703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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