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빼앗긴 밤에도 별이 빛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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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6-02 13:43 조회5,3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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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고향 북간도에 있는 어머니와 친구들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등 자신이 살아오면서 마주쳤던 존재들을 가만히 불러본다. 그것은 지극한 그리움과 고독이 일으킨 영혼의 떨림인데, 경성에 유학 와 있던 윤동주의 온몸과 온 정신을 휘감은 식민지 현실이 불러일으킨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1940년대의 시를 읽으면 지금도 그의 고통이 전해오는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윤동주가 겪어야 했던 현실은 그의 언어에 비상한 에너지와 밀도와 긴장을 부여했다. 윤동주의 영혼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빠르게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언제나 정신과 영혼의 고통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다. 이래서 시는 지옥에서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최근에 어느 젊은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세대가 느끼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중간중간 책을 덮어야 했다. ‘안다’는 것과 ‘느낀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느낌이 없는 앎은 도그마가 될 수 있지만 느낌을 통한 앎은 기왕의 앎을 수시로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다른 물결이 들어오게 한다. 이 과정의 연속을 우리는 생기(生氣)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시인의 작품에는 리듬이 배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마치 산문을 읽듯이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시에서 ‘노래’가 추방되기 시작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노래가 빠진 시여야 ‘현대성’을 가진다고 암묵적으로 합의라도 된 것일까? 만일 서로 맺은 약속이 아니라면 새로 생긴 문화라고 볼 수밖에 없을 테인데, 그렇다면 어떻게/왜 시에서 노래라는 속성이 사라지게 된 것일까, 질문을 던져보는 게 적절한 태도일 것이다.
시에서 왜 노래가 사라졌을까
어릴 때 잠깐 초가집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다. 도시 변두리의 낡은 단칸방에서만 살다가 시골의 초가집으로 가게 된 배경은 순전히 개인사에 해당되니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마을에서 전기가 유일하게 안 들어오는 초가집에서 살 때, 마을의 고샅길에도 가로등이 없어서 달이 뜨지 않는 날이나 흐린 날 늦은 밤에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을 지배했다. 전기가 그렇게 흔하지도 않아 마루에 불을 켜두는 집은 없었고, 다들 일찍 잠에 들 만큼 농사일이 고됐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방 안의 전등도 5촉짜리 백열등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어린 우리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당산나무였다. 왜냐면 그 나무에는 귀신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연주의 작가 헨리 베스턴은 “인간의 경험에서 밤을 제외하면, 인류의 모험에 깊이를 더해주는 종교적 감정과 시적 분위기도 사라진다”며 “밤을 경외하고 밤에 대한 천박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라” 했다. 우리가 밤을 미워하고 천박하게 두려워하는 사태는 세상이 전깃불로 뒤덮이고 난 이후에 극심해졌는지도 모른다. 서울 같은 제국적인 대도시는 이미 밤을 식민화시켜버린 지 오래되었다. 지구의 그림자인 밤을 지우는 대신 곳곳에 인위적인 어둠을 만들고, 그 속에서 온갖 비리와 협잡과 음탕을 번식시켰다. 다르게 말하면, 밤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 자체를 잃어버려서 이리 된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는 곳곳에서 때를 가릴 것 없이 목격한바 그대로다.
또 우리에게 밤이 없다면 우주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리듬을 느끼지 못한다. 윤동주로 하여금 별을 헤게 한 것도 별빛이 내는 리듬 때문이었다. 말이 거창해서 우주이지, 밤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우리는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풀벌레의 소리, 소쩍새 소리에 가득 차 있는 리듬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느낌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의 영혼이 빈곤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노래를 잃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거대한 인공 구조물들과 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매일 처참하게 잘린 푸른 나무들뿐이다. 사고가 나면 우리에게 궤멸적인 파괴를 안길 핵발전소도 결국 밤을 삭제하기 위함이었고, 또 그것을 위해 핵발전소를 더 늘리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밤을 버린 것과 연관된 듯
정말로 최근의 우리 ‘현대시’에서 노래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밤이 사라진 것과 관계있는 것은 아닐까? 엉뚱하다고 야단치기 전에, 밤이 사라지던 시간과 시에서 노래가 희미해져 간 시간이 어떻게 겹치는지 먼저 살필 일이다. 결국 노래가 사라지면 영혼의 비상도 힘들어지는데, 이미 우리는 ‘별 헤는 밤’을 빼앗긴 존재들이면서 동시에 그 밤을 버린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이 만드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번 봄에 꿀벌 78억마리가 죽었다.
황규관 시인
한겨레신문 2022년 5월 2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50203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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