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시간강사의 ‘은퇴’ 아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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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8-01 12:42 조회5,2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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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 장사'라고들 불렀다. 대학에 정규직 자리를 얻지 못하고 이 대학 저 대학에서 강의하는 시간강사의 직업 말이다. 최근에 TV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서 시간강사의 보따리 장사가 대학가의 만물상인가, 잠깐 생각했다. 인터넷을 통한 비대면 상품 소비 시대에 만물상은 온갖 물건을 바리바리 쌓고 오지의 주민들, 특히 나이 든 이들을 찾아가 직접 건넨다. 시대착오적인 장사 방식이지만, 기술 면에서 시대착오적인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그야말로 시대에 들어맞는 방식이다.
게다가 집에 손볼 일이 있으면 그건 덤! 만물상의 트럭 안에는 없는 거 빼곤 다 있다. 시간강사의 보따리에도 없는 거 빼곤 다 있다. 전공을 고집스레 주장할 자유보다는 장사 나가는 대학 학과의 요청에 따라 강의 물품을 준비한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히 다르다. 시간강사의 보따리 장사는 점점 더 일반화되는 노동 유연화와 문화/지식 생산 및 판매의 일인 프로젝트화 추세에 발맞춰 진행된다. 불안정 노동이고, ‘사제지간’이라는 관계성의 구축도 어려우며 퇴직금이나 연금, 소속감이나 그에 따른 상호 책임도 없다. 대학이 갖추고 있는 인프라에 접근할 권리도 매우 제한적이다. 강사법 제정 이후 명칭이 강사로 바뀌었어도 시간강사 신분에는 별 변화가 없다.
시간/강사와 정규직 교수는 밥도 같이 먹지만, 두 계층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져 있다. 본인이 재직하는 대학의 강사료가 시간당 얼마인지 알고 있는, 아니 진심으로 알고자 하는 교수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이 만물상으로 돈을 꽤 벌 듯이, 시간/강사로 ‘부자 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카리아트로서 시간/강사의 위치는 시간이 갈수록 취약해지고, 경력자로 권위를 얻기도 너무 어렵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나는 1993년에 시작한 보따리 장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연구교수 직책까지 포함해 비정규 보따리 장사를 거의 삼십여 년 해온 셈이다. 이번에 내가 보따리를 풀었던 대학에서는, 학과가 아닌 연구소의 요청으로 강사 계약을 했던 터라, 교무과에서 보낸 단 두 줄의 통보문이 끝을 알리는 내용 전부였다. 내게는 아카데미에서 ‘은퇴’하는 의미심장한 일이지만 저들에게야 두 줄짜리 문건 전송의 일일 뿐이다. 애썼다, 감사하다 등의 수식어조차 불필요한 행정 처리다. ‘참으로 예의가 없구나,’ 정규직으로 은퇴하는 교수들에게 의당 선사 되는 ‘의례’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의례조차 강사들에게는 배분되지 않는구나, 통감했다.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두근대던 심장박동이 지금도 선명하다.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아도, 아침에 눈을 떠도 반딧불처럼 눈앞에 동동 떠다니던 학생 얼굴들. 학생들과의 이런 가슴 뛰는 ‘열애’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대학은 매 학기 학위를 마치고 강의실에 들어서는 신참 강사의 이 ‘열애’를 사유화하며, 아니 착취하며 유지된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보따리를 챙겼던, 열에 들떠 학생들을 만나곤 했던 시간강사들에게 그 ‘시간’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의례 하나 마련해 주지 않는 대학들에 분노와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십여 년 동안 10개 대학에서 보따리를 풀었던 나는 매번 ‘뒤돌아보지 말라’는, 소속감 없음의 자유를 누리라는 무언의 명령에 떠밀리며 여기까지 왔다. 많은 사람이 전통적 의미의 은퇴가 불가능한, 직업 아닌 직업에서 은퇴한다. 이들이 적어도 ‘뒤돌아볼 수 있는’, 의미를 되새김질하며 기억 작업을 할 수 있는, 그 정도 의례도 만들지 못하는 대학 사회라면 고등교육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시간강사에게도 은퇴가 가능한 시스템을 고민하자.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충청리뷰 2022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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