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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다시 본다, 고전 '올랜도'도, 버지니아도 성별 제약 없는 다양한 삶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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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8-01 17:33 조회5,3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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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프라이가 그린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1917). 위키미디어 커먼스

20세기의 위대한 모더니스트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야심작 '등대로'를 집필한 뒤 ‘작가의 휴식’을 즐기는 기분으로 소설 한 편을 쓰기로 했다. 그녀는 대작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신나게 노는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원하는 대로 써 내려갔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작품이 '올랜도'(1928)다. 이 소설은 16세기 영국의 귀족 청년 올랜도가 400년을 살면서 겪었던 존재의 모험을 그린 것이다. 그는 러시아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터키 대사로 가서 정치 활동을 하고, 여성이 되어 집시 무리 속에서 지내기도 한다. 18세기에는 영국 사교계 생활을 신물 나게 즐기고, 19세기에는 어딜 가든 모두가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는 사실에 압박감을 느낀다. 남성에서 여성이 된 그녀는 자기 기질에는 안 맞지만 시대정신에 무조건 항복하는 기분으로 남편을 얻는다. 소설이 마무리되는 1928년에 올랜도는 36세의 여성으로서 시집을 출간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올랜도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소년이 되어 보고 싶다는 평범한 소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전 손택은 말했다. "제가 아는 한 지적이거나 독립적이거나 활동적이거나 열정적인 여자아이들 중에 어린 시절 소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 더 큰 자유를 누리는 성(性)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겁니다."('수전 손택의 말'·마음산책 발행) 소녀들은 대개 이걸 해도 안 되고 저걸 해도 안 된다는 식의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란다. 실비아 플라스는 이렇게 불평했다. "이 모든 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망가져버리고 만다. (…) 아 제기랄, 그렇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야외에서 잠을 자고, 서부로 여행을 하고, 밤에 마음껏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문예출판사 발행) 소년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성별의 제약 없이 다양한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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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찰스 베레스포드가 찍은 스무 살의 버지니아 울프(1902). 위키미디어 커먼스

두 여성 작가보다 반세기 앞선 세대인 버지니아가 여성으로서 겪은 제약은 훨씬 더 심했다. 케임브리지대에 다니던 오빠 토비는 수재로 명성을 날리는 대학 동기 몇몇과 어울려 블룸스버리 그룹을 결성했다. 그녀는 그 그룹에서 함께 토론하고 공부할 만큼 영리했지만, 대학은 물론이고 정식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케임브리지를 방문했을 때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쫓겨나기도 했다. 여자는 교내 잔디를 거닐 수도 없고 소개장이 없으면 도서관에 출입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버지니아는 소설 속에서 올랜도가 되어 보기로 했다. 그녀는 주인공과 함께 남자로 살다가 다시 여자가 되어 살기도 하면서 죽음, 사랑, 시, 정치, 사교계, 출산 등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는 특권을 누린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올랜도는 순정만화에나 나올 만한 미소년이었는데, 이는 버지니아가 열렬히 사랑한 여성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를 모델로 한 것이다. 후일 비타의 아들 나이젤 니콜슨은 비타에게 헌정된 이 작품을 "문학사상 가장 길고 멋진 연애편지"라고 평했다.

여성으로 변할 때 올랜도는 7일 동안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다. 제이 프로서와 같은 이론가는 이 소설이 트랜스섹슈얼(성전환)의 모티브를 마술적인 방식으로 가볍게 사용하면서, 한 사람이 성전환 이전까지 겪게 되는 고통 서사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했다(임옥희 '젠더이주로 읽어본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그러나 트랜스섹슈얼의 서사가 고통스러운 것은 그들의 변화에서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한 남성이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을, 혹은 그 반대의 간절한 소망을 삶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독성 물질처럼 취급하는 어떤 이들의 편협함과 악의가 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생애 서사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400년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망할까? 올랜도는 시인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300년 넘게 고치며 간직해 온 시집 '참나무'를 20세기에 마침내 출간한다. 나는 뭘 원하지? 당신은? 만인의 만 가지 소망과 만 개의 길이 있다. 만일 여성이 되길 열렬히 원하는 청년이 있다면 조용히 지켜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의 삶을 고요하게 축복해 주자. 아무도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힘들다는 성 재할당 수술도 올랜도의 7일 동안의 잠처럼 신비롭기만 할 것이다. 한 사람이 간절하게 소망하는 삶을 도대체 왜 방해하려고 하는가? 아무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다. 올랜도에게서 여성이 되고 싶었고 또 좋은 군인이 되고 싶었던 한 사람의 맑은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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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버지니아 울프 지음·박희진 옮김·솔 발행·304쪽·1만4,500원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22년 6월 9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Print/A202206090009000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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