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당신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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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8-09 12:25 조회7,2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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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집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집을 ‘삶의 터전’이라는 그 본연의 가치가 아닌, 경제적인 가치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집은 하나의 자산이자 투자처로, 때때로 일확천금까지 노릴 수 있는 도박의 대상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이는 ‘부동산 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집을 ‘사는 곳’이 아닌 ‘사고 파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미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모나 숄레, 『지금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있나요?』, 부키, 2019).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은 모순적인 가치를 내재하게 된다. 그것은 부를 축적하는 데 가장 용이한 자산인 동시에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생존 요소라는 이중의 가치 속에 놓여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집은 필연적으로 정치의 대상이 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부동산 정책에 가장 신경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집의 소용(所用)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재택근무와 원격수업이 늘어나면서 집의 용도가 확장됐기 때문이다. 집과 관련된 프로그램의 증가나 관심만 해도 그렇다. <구해줘! 홈즈>, <신박한 정리>, <컴백홈>, <서울엔 우리집이 없다>, <판타집>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높은 화제성과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같은 사회적인 맥락 위에 놓여있다. 하지만 산업화 이전까지 집은 단지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공간이기도 했음을 상기해 보라. 집의 기능 확장은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 이전으로 돌아간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집은 본래의 가치를 회복한 것일까? 사실 이것은 대단히 모순적인 질문이다. 집의 기능과 집의 가치는 유사한 듯 보이지만, 그대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집의 변화를 확장으로 볼 것인지 퇴행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집은 과거보다 더 완벽한 공간이 됐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집은 이전보다 더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를 맛보게 만드는 공간이 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팬데믹이라는 상황은 그 균열을 보다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계간 창작과비평 표지
3포세대라는 우울한 용어와 함께 부각되고 있는 청년문제는 집의 경제적 가치가 부풀려지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더 큰 위기로 치달아 왔다. 계간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에 발표된 손원평의 「타인의 집」은 주거 자체가 하나의 계급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모순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셰어하우스’다. 한동안 그것은 청년들의 주거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법이자 낭만적인 주거공유의 형태로서 일종의 붐을 이뤘다. 2030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웹툰이나 웹드라마에서 셰어하우스가 낭만적인 이야기의 배경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하지만 「타인의 집」은 그 낭만성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허구적인 것인지를 신랄하게 보여준다.
머릿속의 생각을 맺기도 전, 두 귀가 쫑긋 선다. 반갑지 않은 소리가 한순간 모든 걸 망쳐놓는다. 아무리 큰 소음 속에서도, 건반을 강타하는 임동혁의 역동적인 선율 속에서도 영혼을 조개는 도어록의 날 선 금속성 소리는 기어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존재감을 과시한다. 나는 총성을 들은 한밤의 야생동물처럼 한달음에 달려 들어와 도어록이 해제되기 전 방문을 닫는 데 가까스로 성공한다. (중략) 순식간에 내 공간은 집의 사분의 일만큼 줄어들었다.
-「 타인의 집」, 220-221쪽.
이 집에 살게 된 후 내겐 다시 인생의 방향과 목표가 생겼다. 언젠가는 온전하게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반의반만큼 접힌 집이 아닌, 나만을 위해, 내 가치만큼 존재해줄 집 말이다.
-「 타인의 집」, 229쪽.
주인공인 ‘나’는 “애인과는 파토 나고 회사에선 잘리고 살던 집에선 월세 인상에 못 이겨 쫓겨”(224쪽)난 최악의 상황에서 쾌조가 운영하는 셰어하우스에 입주하게 된다. 방 3개짜리 시내 아파트를 4명이 나눠 쓰는 구조로, 셰어 호스트인 쾌조는 거실을 사용했다. 고시텔을 전전하며 살아왔던 ‘나’에게는 처음으로 ‘집’이라는 생활공간을 각인시켜 준 장소였다. 하지만 셰어하우스라는 주거공유모델이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인 가치는 어쩌면 딱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살고 있지만,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야기한다. ‘나’가 동거인들의 귀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방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어떤 이름을 붙인다 해도 그곳은 어쩔 수 없는 ‘1/n’로 가치가 축소된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언젠가 꽉 찬 ‘1’의 공간, 온전한 ‘집’을 꿈꾼다.
-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목표가 있으니까.
- 목표요?
- 네, 이런 집을 사는 거요.
그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말하는 순간 내 몸엔 가벼운 소름이 돋아났다. 그의 꿈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가 절대 목표를 이루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은 동시에 나를 향한 자괴감으로 바뀌었다. 모든 게 쾌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해내지 못할 걸 나라고 이룰 수 있을까.
-「 타인의 집」, 233쪽.
하지만 희망이 자괴감으로, 그리고 다시 절망으로 바뀌는 것 역시 찰나였다. 자신의 전셋집을 셰어하우스로 활용하는 한편 전업 주식투자자로 살아가는 쾌조의 꿈 역시 결국은 자신의 온전한 집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 꿈을 쟁취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만의 사적 공간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쾌조의 꿈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 집은 잠시 그들에게 ‘집’에 살고 있다는 착시를 줬지만, 결국 ‘나’와 쾌조 모두 타인의 집에 잠시 머무르는 자에 불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문장웹진 2021년 3월호 커버스토리
하지만 집을 둘러싼 문제적 상황은 단지 경제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본질적인 안정이 무너졌을 때 시작된다. 집은 한 개인의 사생활과 안전을 보호해주는 가장 사적인 방어막으로서 작용한다. 그것이 무너졌을 때, 집은 때때로 더 큰 공포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2021년 3월 1일 『문장웹진』에 실린 안보윤의 「바늘 끝에는 몇 개의 불행이」는 가장 내밀한 공간이 불안과 공포의 장소가 되는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 젊은 사람이 말이야.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경찰이 남자를 다독이고, 남자가 경찰의 훈계에 고개를 끄덕이며 굽신대는 모습을 하진은 기가 막힌 채 바라보았다. 경찰이 왜 남자의 사랑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왜 자신이 아닌 처음 보는 경찰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고 있을까. 하진의 집에 불법 침입이 일어났고 하진이 신고해 범인을 잡았음에도 모든 처리 과정에서 정작 하진만이 배제된 느낌이었다.
-「 바늘 끝에는 몇 개의 불행이」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인지도 모른다. 귀가하는 여성을 쫓아와 침입하려던 괴한이 훈방조치 되는 일이나, 반복되는 스토킹을 절절한 로맨스로 치부하는 일. 살인이나 성범죄와 같은 강력범죄가 실제 발생하지 않는 한, 이런 것들은 모두 경범죄로 처리된다. 힘겹게 국회를 통과한 약칭 ‘스토킹처벌법’은 2021년 10월 21일부터 시행이 예정돼 있지만, 규정의 모호성과 반의사불벌죄가 삭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말이 벌써 나오고 있다.
하진이 눈을 번쩍 뜨자 엄마는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손을 떼진 않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엄마가 상체 힘을 실어 하진의 목을 눌렀다. 하진은 돼지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정신없이 할퀴고 잡아 뜯느라 엄마 손이 아니라 자신의 목과 뺨이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몰랐다. 이모가 뛰어 들어와 엄마를 끌어낼 때까지도 엄마는 양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힘을 주느라 가운데로 한껏 몰린 눈코입이 튀어나올 듯 붉었다. 오 분, 어쩌면 삼 분도 되지 않을 시간이었다. 하진은 구역질을 하다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침대 모서리에 코가 찍힌 다음에야 비로소 고통이 밀려들었다.
-「 바늘 끝에는 몇 개의 불행이」
그뿐만이 아니다. 때로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이 집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함부로 발설되지 않기에 오히려 더 큰 공포로 작동한다. 하진에게 그것은 엄마였다. 아빠의 가출 이후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경험은, 그녀를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어른으로 성장시켰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만의 벽을 쌓는 것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공포와 불안의 공간이 된 집을 다시 ‘집’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동력 역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각된다. 하진이 남자의 침입을 알게 된 것은 이웃사람 때문이었다. 그녀가 집을 비운 낮 시간에 들려온 낯선 소리들. 그 소리를 지나치지 않았던 이웃의 존재는 바로 중학교 동창인 유영이었다. 전교에 딱 두 명 있던 특별상담 대상자. 그것이 바로 하진과 유영이었다.
유영의 목소리가 읊조리듯 작아졌다. 하진에게서 몸을 빼낸 유영이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밀려들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낮인데도 복도는 어둡고 건조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하진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 나는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까 너는.
유영이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 다른 걸 떠올리고 있어. 오다기리 조 엉덩이 같은 거라도.
-「 바늘 끝에는 몇 개의 불행이」
유영으로 인해 하진은 자신을 옭죄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날 뜻밖의 가능성을 자각한다. 그것은 바로 집을 ‘집’답게 만들어 주는 힘이다. 철근과 시멘트라는 물리적인 요소나 숫자로 판단되는 경제적인 가치가 아니라, 서로의 위기를 함께 감지하고 때로 손을 내밀어 주는 신뢰와 연대 속에서만 집은 온전한 ‘집’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 부동산 거품은 이 신뢰와 연대의 부재를 가격으로 지불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집의 본래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은 부동산 정책이나 근사한 인테리어 같은 것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두터운 신뢰와 연대도 시작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집에서 살 것인지 제대로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2021년 7월 30일
르몽드디플로마티크 (http://www.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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