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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황혼육아’, 해법이 아니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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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9-28 16:34 조회5,2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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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집에 와서 나하고 함께 잘래요? 우리 둘 다 혼자잖아요. 혼자 된 지 너무 오래됐어요.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요. 섹스 이야기가 아니에요. 밤을 견뎌내는 걸 말하는 거예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콜로라도주 홀트의 작은 마을. 5월의 어느 늦은 저녁, 남자를 방문한 여자가 다짜고짜 꺼낸 제안이다. 몇십 년을 이웃으로 살았지만 서로의 삶이 어떤지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인 사이다. 여자의 제안은 군더더기가 없다. 담대하고 담백하다. 담대한 척이 아니다. 종이 쇼핑백에 잠옷을 챙겨 들고 여자네 집 뒷문을 두드리는 남자에게 여자는 ‘다음부터 앞문으로 오라’고 말한다. 역시 담대하고 담백하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동년배 남자들의 헐거운 카페 수다 모임에 가는 게 전부였던 남자의 일상이 바뀐다.


여자와 남자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살아낸 삶을 이야기한다. 사건이 있었고, 이미 부서지기 시작했지만, 그냥 유지했던 결혼/가족생활이 있었다. 어쩌면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소문처럼 남아 있던 이 경험들이 비로소 ‘내가 겪은 일’이 된다. 그렇게 주름 자글자글한 두 노년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서로를 알아간다. 늦게 핀 우정? 혹은 사랑이랄까?


<밤에 우리 영혼은>에서 제인 폰다와 로버트 레드포드, 두 노배우가 연륜으로 연기한 노년의 흔치 않은 우정-사랑 이야기는 우아하고 품위 있었으며 신선했다. 그러나, 신선한 충격으로 시작한 영화는 어이없는 상투성으로, 정말 시시하게 끝난다.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나타난 아들 때문이다. 에로스 에너지로 부드럽게 빛나던 여자는 갑자기 손자녀 돌봄을 책임져야 하는 ‘할머니/엄마’로 소환된다.


48년을 살아온 정든 집과 우정-사랑을 나누게 된 파트너를 떠나 여자는 손주를 돌보러 아들이 사는 ‘먼 곳’으로 이사한다. 마른하늘에서 친 날벼락이 이전까지의 담대하고 담백했던 시도를 모조리 한여름 밤의 꿈으로 퇴색시킨다. 황혼육아가 황혼 에로스를 집어삼킨 것. ‘가족’의 위력에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정부는 무상보육 정책을 도입해서, 일·가정 양립을 도모하고 결과적으로 출생률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2022년 현재 실상은 그 목표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이번에 서울시가 발표한 <엄마아빠 행복 프로젝트>에 조부모 등 4촌 이내 친인척의 보육 조력자 지원이 포함된 이유다. 월 40시간 이상 돌볼 때, 아이 1명당 월 30만 원(2명 45만 원·3명 60만 원)의 돌봄 수당을 지원한단다. ‘조부모 등 4촌 이내 친인척’이라고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조모에 해당하는 정책이다. 명명부터가 성별·세대 돌봄 부정의를 은폐시키고 있다.


하루에 거의 6시간 이상 손자녀 돌보고 30만 원 받는 걸 환영할 조모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연구에 따르면 조모의 손자녀 돌봄 이유 중 가장 큰 두 가지는 딸과 며느리의 직업생활을 돕기 위해, 그리고 어린이집 등 기존 시설을 믿을 수가 없어서다. 손자녀를 돌보고 평균 70만 원을 받는다. 그러니 30만 원이라도 보조해 준다면 나쁘진 않겠지만, 자녀 세대나 조모 세대 모두 정부에게 바라는 정책은 ‘아이를 부모가 직접 키울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조절해주고, 믿을 수 있는 공공 보육시설을 늘려달라’는 것이다.


돌봄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 세대 간 돌봄 책임 이전이라는 정의롭지 못한 정책에 코를 박고 있으니, 한숨이 나올 뿐이다. 오십대 이후 여성들의 정체성을 황혼육아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조모에 묶어두려 하지 말라. 무엇이든 하고 싶고, 또 될 수 있는 상상력과 담대한 실천력을 빼앗지 말라.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충청리뷰 2022년 09월 01일 

https://www.cc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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