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연] 당신의 공감이 필요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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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8-18 12:10 조회7,0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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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제대로 품어보지도 못했는데, 저도 모르게 ‘무엇’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무엇’의 의미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떨까? 어떻게든 수습해 보고 다시 주워 담고 싶지만 되지 않는 것들만 가득하다면? 그래서 때로는 등 돌려 도망치고 싶은 자리. 그곳이 지금 ‘나’가 있는 곳이라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청춘’이라고 부른다.
사진1. [멀리서 보면 푸른 봄] 출처: KBS2
대학생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담아낸 웹툰을 원작으로 달콤한 로맨스와 우정으로 그려난 드라마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이 보여주는 청춘의 자화상은 서글프다. ‘핵인싸’ 신입생 여준(박지훈 분)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인물이다. 부유한 집안배경, 잘생긴 외모, 호감을 주는 성격까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멀리서 보았을 때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그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어머니의 방관, 그리고 모든 것에 뛰어난 형에 대한 미움과 열등감. 그의 삶은 삭막했고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그래서 더 맨얼굴로 누군가를 마주하는 것이 힘들다. 그가 완벽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사는 이유다. 이 작품은 ‘핵인싸’라는 가면을 쓰고 세상을 살아가는 여준이라는 인물이 그 가면 밖으로 나와 세상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언뜻 <치즈 인 더 트랩>이 떠오르기도 한다. 두 작품 모두 웹툰을 원작으로 한 캠퍼스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치즈 인 더 트랩>이 주인공 유정에 더 집중했다면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은 주인공 여준뿐만 아니라 여준이 관계 맺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성장하는가에 좀 더 주목한다.
주인공의 성장은 연애와 우정을 통해 성취된다. 아마도 그것은 청춘이라는 타이틀 안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반드시 접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요소이기 때문이리라.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를 맺어 가는가, 이다. 여준은 어찌 보면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인물들과 관계 맺으면서 상처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 출발점은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이다.
먼저 연인이 되는 김소빈(강민아 분)은 어릴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친구들의 따돌림으로 인해 대인공포증을 겪고 있다. 핵인싸 여준과의 만남은 소빈에게는 고통에 가깝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준은 소빈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그것을 통해 자기 상처를 드러낼 용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성장에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우정이다. 여준과 우정을 쌓아나가는 인물은 선배인 남수현(배인혁 분)이다. 여준과 수현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상반된 인물이다. 금수저, 핵인싸로 설명되는 여준과 흙수저, 자발적 아싸로 설명되는 수현은 도무지 접점이 없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관계는 갈등으로 시작되었고, 결코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자신들이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아간다는 사실 말이다. 한 사람은 미소로, 다른 한 사람은 무표정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여준은 수현을 통해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는 것 역시 용기이며 그것이야말로 자기 상처를 극복하는 가장 큰 힘일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2.
사실 언제부터인가 TV에서는 청춘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청춘시대>나 <치즈 인 더 트랩> 같은 드라마들이 높은 화제성을 이끌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코로나 이후에는 더 심각해진 것 같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이나 함께 방영되고 있는 <알고 있지만> 같은 작품 역시 2%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3포세대라는 말의 유행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치열한 입시를 마치고 들어간 대학은 취업사관학교로 변한 지 오래, 모든 것은 취업이라는 척도로 가늠된다. 그것은 캠퍼스의 낭만만 삭제한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들 특유의 날카로운 사회비판까지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현실’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학점과 스펙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만을 낳았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김석희 역, 시공주니어, 2017)을 떠오르게 한다.
사진2. [꽃들에게 희망을] 출처: 교보문고
지금 뭘 더 하고 싶은데?
- 저길 오를 거예요. 더 높은 곳으로.
그건 왜 하는데?
- 더 높으니까요.
무엇을 위한 건데?
- 글쎄요. 저를 위한 거?
저기 오르고 나면 무엇을 할래?
- 음……. 뭐, 좀 보다가 내려오겠죠.
그걸 원한 거니?
- 아뇨. 저기요. 근데 제가 도대체 무엇을 원한 걸까요?
어른들의 위한 동화라는 수사가 붙는 『꽃들에게 희망을』은 애벌레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다른 이들에게 휩쓸려 더 높이 기둥을 오르려고 하는 애벌레들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코로나는 이러한 현실에 가속도를 부여했다. 매일매일 고군분투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는 모르는 상황,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대열의 한 가운데서 끌려가지만 거기에 서 있는 이유도 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윤후의 「내가 되지 않는 것들」(『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은 이러한 우리의 오늘, 슬픈 자화상을 노래한다.
어른들의 위한 동화라는 수사가 붙는 『꽃들에게 희망을』은 애벌레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다른 이들에게 휩쓸려 더 높이 기둥을 오르려고 하는 애벌레들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코로나는 이러한 현실에 가속도를 부여했다. 매일매일 고군분투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는 모르는 상황,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대열의 한 가운데서 끌려가지만 거기에 서 있는 이유도 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윤후의 「내가 되지 않는 것들」(『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은 이러한 우리의 오늘, 슬픈 자화상을 노래한다.
사진3. [무한한 밤 홀로 미로볼 켜네] 출처: 교보문고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바닥을 구슬프게 홀리고도
멀쩡한 것들
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주워 담을 수도 없는 것들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사람을 고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기도가 엇나가는
신의 겨드랑이 뒤에서 어린양 부리는 것들
두서없는 꿈의 멀미를 앓는 것들
표본과 다른 독개구리들
제 안에서 독을 터뜨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꽉 물었던 이름을 놓아버린 것들
매번 진심이었던 생일 다음날처럼
허겁지겁 먹었던 사람의 눈빛이
사과나무 밑에서 배앓이하는
뒤틀린 틈으로 마구 솟구치는 송충이들
하하하 갉아먹히는 오래된 농담들
실없이 저물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에 꽂아둔 실핀들
결코 흘러내리지 않을 것들
내가 매달려도 내가 될 수 없는
공중의 손잡이들
손님 없이 시동 거는 버스 안엔
내가 되진 않고
나를 기다리기만 하는 옆자리들
시인의 바라보는 오늘, 그곳엔 ‘내가 되지 않는 것들’만 가득하다. 그것은 ‘내가 될 수 없는 것들’이며, 원치 않아도 이미 ‘되어버려서’ 되돌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되지 않는 것들’뿐이다. 물론 처음부터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지독하리만치 꿈을 앓아 보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되려고 했던 것은 될 수 없고, 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 어떤 안간힘을 써도 되어버릴 뿐이다. 하지만 ‘나’를 정말 슬프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나’의 절망에 그 어떤 위로도 없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향한 그 어떤 공감도 없이, 그저 ‘나’가 그 ‘무엇’에 도달하기만을 기다리는 그들. 그들이 만드는 이 끔찍한 세계의 진실은 시인의 또 다른 시, 「초절기교(超絶奇巧)」에 담겨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나의 자리’가 없는 곳. 모두가 존재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자리는 없는 곳이다. 물론 그들의 ‘옆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다. 하지만 그곳은 ‘나’의 자리는 아니다. 그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이 잔혹한 희망은 그 어떤 절망보다 폭력적이다. 그것이야말로 끝이 없는 무한경쟁 속에 ‘나’와 우리를 떠미는 힘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3.
다시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이 상기하는 오늘의 청춘으로 돌아와 보자. ‘멀리서 보면 푸른 봄’이라는 말에는 결국 좀 더 가까이 다가와서 봐주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청춘’이라는 말로 손쉽게 모든 것을 봉합하지 않고, 더 가까이에서 더 진실한 모습을 보아주길 바라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공감의 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청춘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청춘을 아프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청춘은 언제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서술된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어떤 청춘도 그들의 청춘을 정의하지 않는다. 청춘은 단 하나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개인의 삶이 긴밀하게 연계되어 드러나는 무형의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이 유기체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다름 아닌 공감이다. 무엇이라 정의내리기보다 좀 더 가깝게 다가오길, 기다려주기보다는 함께 걸어주길. 그것이 당신의, 그리고 우리의 공감이 필요한 청춘의 자리이다.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1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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