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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두 겹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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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6-18 16:06 조회11,2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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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신작 장편 <철도원 삼대>(창비)의 주인공은 발전소 공장 45m 높이의 굴뚝에서 기약 없는 복직투쟁에 나선 50대의 중공업 노동자 이진오다. 긴 소설은 이진오가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발가락들은 운동화 안에서 독수리의 발처럼 잔뜩 오그리고 있을 것이다.” 어렵사리 노사 합의에 이르러 410일 만에 굴뚝에서 내려오기까지(그러나 합의는 지켜지지 않는다), 이진오는 둘러 걸으면 이십보쯤 될 허공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꿈꾸듯 그 자신의 4대에 걸친 가족사이자 한국 근현대사 백년의 세월을 만난다. “이런 모든 일이 그들 가족이 살아가던 같은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다니, 깊은 계곡을 빠르게 굽이쳐 흘러가는 성난 물결의 소용돌이 같은 세월이었다.”

 

책을 읽다 잠시 밖으로 나가면 마스크를 하고 어딘가로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꿈길에 있는 것 같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의 무심한 고요와 잡답이 낯설게 느껴진다. 작가는 책 뒤에 “방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살던 시대와 삶의 흔적은 몇 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느리게 아주 천천히 변화해갈 것이지만 좀 더 나아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고 쓴다. <철도원 삼대>는 방금까지 우리 뒤를 쫓아왔다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시간을 허공에 둔 채 우리를 이루어왔고 이루어가는 역사의 시간을 꿈처럼 드러내어 그것과 단단히 때로는 느슨하게 얽어맨다. 꿈은 비유가 아닌 것이 이진오의 증조모인 주안댁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인 채로 이들이 겪는 대소사에 어김없이 산 사람으로 현신하여 그 크고 두툼한 팔을 걷어붙인다. 경신년부터 을축년 대홍수까지 잇따른 큰 물난리의 와중에 그이가 보인 전설적인 활약이며 그 밖의 긴박하고 맞춤한 현신의 이야기들은 시누인 막음이 할머니의 유다른 입담이자 자신만의 골똘한 생각을 혼자 믿어 버릇하는 데서 부풀려진 것이기 쉬울 테지만, 주안댁이 진오의 조부모인 이일철과 신금이에게도 종종 나타났다는 점에 이르면 이런 일이 우리가 언제든 명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살이의 음덕 같은 것이겠거니 짐작하게 된다. 자식들이 걱정되면 부모가 꿈에라도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영등포 철도공작창 노동자인 부친 이백만을 이어 경의선 특급열차의 기관수로 일하다 해방 공간의 혼란기에 월북하는 이일철, 그리고 부친을 찾아 평양으로 가서 철도원의 길을 걷다 반공포로가 되는 이지산까지 철도원 삼대의 이야기는 일철의 아우 이이철을 따라 사회주의 계열 항일 노동운동의 험로에서 일을 하다 먼지처럼 사라져간 무수한 노동자, 민중의 이야기와 이어진다. ‘경성 콤그룹’과 연계되어 일을 하다 전주형무소에서 옥사하는 이철은 막음이 고모의 말을 늘 우스갯소리로 치부하는데, 그의 동지였다 부인이 되는 한여옥은 말한다. “그냥 따뜻하게 받아주시면 돼요. 세상사란 우리가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잖아요.”

 

정작 고공의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 이진오가 앞선 시간과 만나는 게 간절한 그리움을 통한 사람들의 현신이자 현몽인데, 그때마다 우리의 불신을 정지시키며 말을 걸어오는 뭉근하고 부드러운 전환의 순간이야말로 소설 <철도원 삼대>가 살벌하게 소용돌이치며 지나가버리고 마는 역사의 횡포에 맞서 찾아낸 값진 ‘이야기의 형식’이자 우리의 시간을 구획된 격자에서 흘러나오게 한 예술적 기여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시절과 세태, 하루의 볕과 공기까지 눈앞에 그려내는 기억과 사실의 풍성한 언어로 뒷받침되면서 힘을 얻는데, 그런 것들은 또한 늘 입말과 글말 사이에서 어슷어슷하게 약동하는 언어의 리듬으로 다가온다. 가령, “한쇠(일철-인용자)는 처마 밑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자고 깨는 날이면 어쩐지 아늑하고 고즈넉해서 시끄럽기는커녕 잠이 잘 왔다.” 그것은 다소 역설적이거나 어느 한쪽이 뭉개진 채 연속적인 흐름을 이루는 우리네 삶의 실질에 부합하는 한국어의 배열과 결합의 리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굴뚝 농성 408일의 노동자로부터 세세히 전해 들었다는 굴뚝 위의 일상은 몹시 규칙적이고, 아마 그러지 않고는 한시도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이진오는 ‘셋 동작 체조’로 체력을 단련하며 한발 난간 밖 부드러운 안개의 유혹과 싸운다. 그러면서 이 모든 노력들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철도원 삼대를 거쳐 자신에게 전해진 그 의미.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낸다.” 그 하루하루가 백년이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느낌은 어쩐지 서럽기도 하지만 벅차기도 하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20년 6월9일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86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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