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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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7-17 14:52 조회10,4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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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생님은 환하게 웃고 계셨다. 절을 올린 뒤, 차려주신 밥을 한그릇 잘 먹고 돌아와서 이 글을 쓴다. 작년 봄에 책을 한권 보내주셨다. <대지의 상상력: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녹색평론사). 꽤 긴 분량의 ‘책머리에’에서 선생은 영문학자·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소산인 이 책이 <녹색평론> 탄생의 정신적 전사로 읽히기를 소망한다는 뜻을 특유의 정연하고 담백한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 리처드 라이트, 프란츠 파농 등 책에서 다루는 여덟 작가는 선생에 따르면 “근대의 어둠에 맞서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인데, 내게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흔히 난해하다고 알려진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편이었다. 선생은 ‘책머리에’에서 대학 때 우연히 집어 든 블레이크의 시집 한권이 가져다준 놀라운 충격과 이후 그이의 문학에 빠져들면서 한국 사람이 영문학을 한다는 자괴로부터 얼마간 빠져나오게 된 경위를 술회하고 있지만, 그 오랜 공부와 감동의 온축을 보여주듯 민중적 세계관과 상상력에 단단히 뿌리박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해방적이고 혁명적인 시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 깊이를 덜어내는 바 없이 너무도 명료하고 풍부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접근조차 힘들 것 같던 윌리엄 블레이크로 들어가는 문 하나가 그냥 쉽게 열려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블레이크 편이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블레이크의 시적 도정을 서술하는 선생의 글이 자신이 감동받은 시인에게서 삶과 사유의 실천적 이정표와 지향을 얻겠다는 마음을 글의 행간에 차곡차곡 채워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시인을 ‘시대의 예언자’로 부르는 오래된 수사학은 상당히 낡은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블레이크에게는 아주 온당한 호칭이었던 듯하다. 블레이크에게 ‘예언자’는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이어서 선생은 쓴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언’은 자신이나 남들에게 속임수를 쓸 것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삶과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적 삶의 진실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에게만 그 예언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하면서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근원적 비판과 함께 삶의 전면적인 위기를 선언한 선생의 외로운 외침과 이후의 묵묵한 실행이 ‘예언’에 값하는 것이었음을 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정직하겠다고 다짐한다 해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제약과 왜곡 없는 공평무사한 인식의 추구가 쉽지 않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사유의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인식에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동의의 영역이 적거나 거의 보이지 않는 갈등의 사안에서 우리의 판단은 결국 어떤 입장의 선택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김종철 선생이 블레이크에 기대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정직한 인식’의 용기와 가능성 또한 보편적이고 해방적인 인간 역사의 실현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불가피하게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면, 시는 구체성과 감각적 충실성을 보존하면서 인간 진실의 보편성을 향한 인식론적 경합의 장에 참여한다. “자신이나 남들에게 속임수를 쓸 것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삶과 역사의 진실”은 이데올로기의 언어가 아니라 시의 언어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 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선생이 대학 때 우연히 집어 든 고풍스러운 시집에서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블레이크 시의 한 대목이다. 선생의 사상적 전모를 잘은 모르지만, 일찌감치 근대 산업문명에 기반한 발전사관으로서의 마르크시즘의 한계를 꿰뚫고 욕망의 절제와 생명 존중에 기반한 생태 사상의 구체적 의제를 끊임없이 한국 사회에 제출했던 용기와 자유의 뿌리 하나를 이 어름에서 짐작해본다. 생각해보면 이 지면에 어쭙잖은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나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과 언어가 있는가 하는 자문이었다. 날선 목소리의 회피를, 나 자신을 조금은 덜 속이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지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내가 나 자신에게 썼던 속임수는 남는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20년 6월 30일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16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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