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반성과 발언의 방식이 내게는 문학이었어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7-05 15:58 조회8,09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팔순 맞아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낸 평론가 염무웅
“먼저 간 친구들이 맡긴 일 한다 생각해”
“먼저 간 친구들이 맡긴 일 한다 생각해”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염무웅 지음/창비·1만6000원
“팔순 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럴 텐데, 벌써 나이가 이렇게 들었나 하는 생각이 우선 듭니다. 젊은 시절부터 사귀었던 문인 친구들 중 상당수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하려다 못한 일까지 나한테 떠맡기고 떠났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죠.”
팔순을 맞는 감회를 묻는 질문에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은 세상을 뜬 친구들 이야기부터 꺼냈다. 대학 시절에 가장 친했던 평론가 김현과 김치수는 이미 고인이 됐고, 그들의 서울대 불문과 동기인 소설가 김승옥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고 있다. 팔순 기념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를 낸 염 관장을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학원 접견실에서 만났다.
팔순을 맞아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를 낸 문학평론가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 “해방에서부터 1970년대까지를 대상으로 삼아 문인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는 책을 다음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29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모두 4부로 이루어진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의 제1부에도 그의 문단 안팎 교유가 다채롭게 회고되어 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동기인 시인 조태일을 필두로 선배 소설가 이호철, 미술평론가 김윤수, 화가이자 문화기획가 김용태, 자유인 채현국 등의 인간적 면모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의리와 고집의 사나이” 조태일, “최루탄 가스 뒤범벅된 도심의 거리에서 젊은이들에 섞여 짱돌을 던지기도 하였”던 김윤수, “드문 기인(奇人)이자 광기의 철인(哲人)이고 쉴 줄 모르는 학인(學人)이자 통 큰 대인(大人)이었던” 채현국 등에 관한 묘사와 평가는 글쓴이 자신의 직접 경험과 관찰의 결과라서 한결 신뢰감을 준다. 그가 교양지 <샘터>의 창간 편집장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열두어 살 무렵에 만난 청소년 문예지 <학원>을 일러 “내 인생에서는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고 한 회고가 뭉클하다.
신춘문예 당선에서부터 치더라도 그의 문학 인생은 어느덧 60년 가까이에 이른다. 문학을 선택한 일을 혹시 후회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 문학이 그의 삶에 어떻게 힘이 되어 주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나한테는 두 가지 욕구가 있어요. 하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죠. 저로서는 문학을 통해 그 양자를 결합시킬 수 있었습니다. 줄탁동시라는 말처럼 나를 반성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위해 발언할 수 있는 방식이 나한테는 문학이 아니었나 싶어요. 과거에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이 있었지만, 나는 순수문학의 가장 순수한 개념에 충실한 문학과 세상에 대해서 책임 의식을 가지는 문학이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팔순을 맞아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를 낸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산문집 제2부에는 문학을 사회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본 칼럼 성격의 글들을 모았고, 3부는 분단과 통일 등 한반도 상황을 궁구한 국내외 저작들에 대한 독서 칼럼들이며, 4부는 3부에 이어지는 문제의식으로 분단 역사와 현실을 돌아보는 글들로 이루어졌다. 책 제목은 시인이자 작곡가 겸 가수로서 온몸으로 독일 분단에 맞서 싸웠던 볼프 비어만이 한국 인터뷰어에게 했던 말에서 가져왔다. “남북한의 통일이 낙원을 가져오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지옥에 이르지 않게 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통일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 지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이제 나의 희망이라는 말입니다.” 비어만의 생각을 이어받아 염 관장이 말한다.
“알고 보면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들, 양극화라든가 빈부격차라든가 교육문제를 비롯한 각종 모순들의 뿌리를 캐보면 하나같이 분단상황과 연결이 돼 있습니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조종자인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실상 절반의 주권만 지니고 있는 형편입니다. 분단 극복이 꼭 통일일 필요는 없고, 남과 북이 평화롭게 왕래하고 경제교류를 하면 국호를 따로 쓰는 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분단 현실의 극복을 향한 염원을 거듭 강조하는 한편에서 그는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지난 25일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1주기 추모모임에서 발제와 토론을 들으면서도 저는 답을 찾기 힘들더군요.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어떤 악당이 만든 게 아니라 ‘필연’이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이제 와서 소농 위주의 자급자족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 개인의 종말 즉 죽음을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의 종말도 자연사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게 너무 급격하게 진행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은 필요하겠지요.”
요즘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나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처럼 문명의 위치와 방향을 다룬 책들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는 염 관장은 “최인훈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니 평론가로서 마무리도 최인훈론으로 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최인훈은 문명사적 고민을 한 정말 좋은 작가입니다. 그분의 소설 <화두>를 보더라도 사회주의에 대한 원망(바람)이 있어요. 그런데 현실사회주의는 그분이 생각한 사회주의로부터는 이탈한 것이었고 그것을 그분은 고통스러워했죠. 그분이 정말 원한 건 자유로운 사회주의였다고 생각해요.”
그가 관장으로 있는 국립한국문학관은 최근 설계공모 당선작을 냄으로써 개관을 위한 중요한 한 발을 내디뎠다. 마지막으로, 문학관의 청사진에 관한 말을 청해 들었다.
“문학관의 제일 중요한 기능은 자료를 충실하게 수집·분류하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건 전시실이지만, 적어도 전시실의 세 배는 되는 수장고가 필요해요. 오래된 책들을 보존 처리하는 게 중요하고, 지방 문학관 및 사설 문학관 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합니다. 아울러, 문학 연구 과정을 두어서 연구자들을 양성하는 것 역시 문학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장기적이고 꿈 같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위한 기초를 만들어서 후임들에게 넘겼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팔순을 맞아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를 낸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
한겨레 2021년 7월 2일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01851.html#csidx47c6da139be4b29871bedaba9e90b9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