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70년 만에 전장에서 돌아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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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6-29 11:53 조회10,57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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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중앙도서관은 6월8일부터 11월20일까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순간: 서울대인과 서울대 도서관의 경험’이라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한국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열사 50주기,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올해를 기념하여 20장의 포스터와 함께 관련된 책과 유품을 전시한다.
이 특별전 개최에는 두 가지 계기가 더 있었다. 첫째는 2016년 개교 70주년을 맞아 교내의 역사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학교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서울대 학생운동사 연구의 결실인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서울대 학생운동 70년>(전4권)이 출간된 일이었다. 진작 나왔어야 마땅한 책이지만, 지난 10일 6월항쟁 기념일에 맞춰 도서관에서 간소한 출판기념회를 열기도 했다.
두 번째 계기는 한국전쟁 중에 도서관이 잃어버린 책이 해외에서 되돌아온 예상 밖의 사건이었다. 지난 2월20일 서울대 언어학과 김주원 교수는 아무 인연이 없는 한 영국 작가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앨런 가너라는 이름난 청소년문학 작가가 자신이 서울대 도서관 장서를 한 권 가지고 있으며, 나이가 만 85세여서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반환할 수 없을 것 같아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1955년 전역을 앞둔 초급장교였던 앨런 가너에게 한 병사가 찾아와 책 하나를 내밀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1951년 1월 초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부대원들과 함께 현재의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 도서관에 몸을 숨겼다. 강추위에 몸을 녹일 땔감은 책과 서가밖에 없었다. 마침내 부대가 탈출의 기회를 잡은 순간, 그는 살아남는다면 이 끔찍한 경험을 증언할 물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무 책이나 집어들고 뛰쳐나갔다고 한다. 그 책이 1548년 취리히에서 라틴어로 출간된 테오도르 부흐만의 <모든 문자와 언어의 공통 본성론>이었다. 그는 목숨을 건졌고 책도 함께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4년 후 그는 악몽 같은 기억의 증거를 치워버리려 했다. 가너는 값진 물건 같다며 감정을 권했지만, 병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가너는 전역 후 대학에서 고전어를 공부하며 지도교수에게 책을 보여주었다. 책을 본 지도교수는 이 책의 저자가 이슬람 경전인 쿠란의 라틴어 초역본의 편집자임을 알려주며 귀한 책이라고 일러줬다. 1974년 우연히 재미 한국 학자를 만난 가너는 이 책을 돌려보낼 길을 문의했지만, 한국은 아직 안전하지 않으며 이 고서가 무사히 전쟁을 피했으니 이대로 당신이 간직하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다.
김주원 교수는 도서관장인 내게 가너의 편지를 곧바로 전달했다. 나도 구상 중인 특별전에 그 책의 사연을 넣겠다는 e메일을 그날로 보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답을 받았다. 마침내 4월9일 작가와 친분이 있는 고서적상을 통해 잘 포장하여 발송한 책이 도서관에 당도했다. 만 70년에서 9개월이 모자라는 세월이 흐른 후, 코로나19 대유행의 봉쇄 상황을 뚫고서였다.
사흘 전 우리는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단숨에 폭파되는 충격적인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2018년 일련의 남북 정상회담과 사상 최초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큰 기대 속에 열렸지만, 작년 초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1년이 훌쩍 넘도록 경색 국면을 풀지 못한 끝에 한반도는 또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잘 극복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가너가 보낸 책을 점검해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안재원 교수에 따르면, 1709년에 두 두엣 박사라는 이가 소장한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일반적으로 소장처를 표기하는 표지 하단이 잘려나간 상태를 보면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개인도서관까지 보유했던 두 두엣 박사의 장서를 누군가 훔쳐 다른 곳에 팔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입수되었다가 다시 서울대 도서관 장서가 되었다. 그 기구한 행로를 보며 우리는 왜 ‘판문점선언’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선택지인지 실감할 수 있다. 우리가 또다시 전쟁의 길로 끌려 들어갈 수는 없으며, 어떻게든 판문점선언을 되살려 차근차근 실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책을 안전하게 지킬 이유는 차고 넘친다. 돌아온 고서의 사연에서 한반도 주민들이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여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담대한 용기를 얻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경향신문 2020년 6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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