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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우리의 핏물이' 밴 도마 위에서 의심 가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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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09-04 09:36 조회7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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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신해욱 지음 l 봄날의책(2024)


시가 주문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누군가의 입술 바깥으로 밀려 나온 말이 지상을 휩쓸고 구천을 떠돌다 곧이곧대로만 둘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다르게 꿈틀거리라고 새로이 숨을 불어넣을 때가 그렇다. 시의 기원을 오래전 인간이 무리 지어 살기 시작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바라며 부르던 노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려서만은 아니다. 오늘의 어떤 시가 시작과 끝에 대한 상상만이 난무하고 그 중간과정은 없는 세상을 향해 “종점에서 종점까지” 그사이에 놓인 ‘에서’와 ‘까지’에 집중하고, 우리가 기어이 “종점을 지나”갈 수 있도록 ‘끝났다’는 말로부터 “부족해지고 싶다”(‘종말 처리’)고 읊고 있어서다. 또 다른 어떤 시는 “골수”가 “사무치”도록 병이 깃든 세상을 향해 마치 할머니의 술빵이 부푸는 모양새와 같이 새로운 살이 오를 수 있도록 “차도가 있을 거야”(‘속이 깊은 집’) 외고 있어서다. 이 예사롭지 않은 발성은 시가 세상의 기본 뼈대가 되는 밑그림인 “가장자리”를 짚어나갈 때 솟아난다.


“도마를 말리자. 생각이 난다.// 생각이 난다. 우리는 젖은 손으로 깨어나. 아차.// 도마를 말리자.// 부탁이 있다. 마지막 부탁이야. 우리는 부탁을 받았지. 벽을 더듬었지. 우리는 암암리에. 우리는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굴종의 왜소한 자세로. 도마에 마님을 눕히고. 다 같이 도마를 짊어지고. 도마를 말리자. 구멍을 찾아. 구멍으로 드는 볕을 따라. 바야흐로 벽을 통과해야 했는데.// 벽에는 못이 있다. 마지막 못이야. 습기를 머금은 마룻널을 삐거덕거리며. 바닥은 냉골이다. 우리는 벽을 더듬고 있습니다. 우리는 젖은 손으로. 못을 뽑으면 집은 무너진대. 마님. 속에서부터 허물어진대. 속은 깊대. 속에는 도마가 있는데.// 우리는 가벽에 속은 것 같습니다.// 젖은 손에는 닿지 않는 높이. 젖은 손으로는 더듬을 수 없는 깊이. 맹검이다. 이중맹검을 당한 거야. 우리는 내막이 궁금했는데.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가만있어봐 좀. 도마에 젖은 손을 올리고. 손날을 높이 들어 서로의 손목을 내리치고. 손 대신 고무장갑을 끼어야 했을까.// 우리는 면벽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벽에는 못이 있다. 못은 흔들린다. 부식되는 철의 소리. 방울방울 떨어지는 녹물 소리. 우리는 못에 붙들려. 능멸에 길든 듯이. 맹종의 쾌락에 취한 듯이. 마님. 속은 깊대. 속에는 도마가 있는데. 우리의 핏물이 배었는데. 못은 뽑아야 하는 걸까. 지켜야 하는 걸까.// 우리는 촉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도마를 말리자.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도마를 말리자’ 전문)


젖어 있던 도마를 “말리”면, 도마를 쓰려고 취했던 자세가 구부정한 밑그림인 “굴종의 왜소한 자세”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젖은 손”으로부터 멀어져 “젖은 손”으로 해왔던 일을 살필 것. “능멸에 길든 듯이” “맹종의 쾌락에 취한 듯이” 그냥저냥 세상이 돌아가도록 ‘젖어’ 있지는 않은지 볼 것. “우리의 핏물이” 밴 도마 위에서 의심 없이(기독교 성경에서도 ‘도마’는 의심이 많은 이였는데) 살림을 구축해오지 않았는지 촉각을 세울 것. “도마를 말리자.” 나는 어쩐지 이 말이 ‘도마를 말리고 나니 비로소 생각이 나더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무언가에 젖은 채 모든 것을 흐릿하게 바라보는 이들을 향한 주문(呪文) 그리고 그런 이들이 쥐고 흔들려는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주문(注文)처럼 읽힌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겨레 2024년 8월 23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5496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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