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 일부러 틀린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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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7-31 10:39 조회10,4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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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눈을 뜨고 모든 밤’
시집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문학동네, 2020)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들을 찬찬히 따라 읽다가 문득문득 제일 앞표지로 돌아가 제목을 살피게 되는 책이 있다. 김경인의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가 그러하다.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라니. 우리가 무언가를 틀렸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맞는 것’이란 무엇인지 그 기준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한 판단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를 논하는 일만큼이나 복잡하고 간단치가 않다는 얘기다. 한편 ‘틀리게’라는 말 앞에 ‘일부러’라는 표현을 두어본다면? ‘일부러’ 맞지 않은 방향을 가늠하면서 판단을 하려는 이의 방식이란 달리 말해 정답으로 향하는 길에 ‘일부러’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말인가?
시인이 전하는 ‘일부러 틀리게’라는 태도는 때때로 어떤 진실은 모두가 승인하는 정답에 이르지 않아야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린다. ‘일부러 틀리게’라는 말 다음에 ‘진심으로’라는 말을 두었으니, 어쩌면 시인은 무엇이 옳다고, 무엇이 틀렸다고 목청껏 외치는 이들의 당당한 단정(斷定)이 실은 과장된 감정에 휩싸인 가짜일 수 있다고, ‘일부러 틀린’ 길을 가는 이가 독보적으로 품고 있을 진심을 통해 지켜질 진실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김경인의 이번 시집에는 짧은 순간에 이뤄지는 결정을 멀리하고 낮은 자세로 차분하게 숙고하는 시공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령,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나’를 향해 여러 이미지들이 겹겹이 달려드는 ‘밤’에 마련된 숙고의 순간이 드러나는 다음의 시.
“나직이 흘려보내는 희미한 글자들이 유리창에 붙었다 사라진다/ 듣기 좋은 밤이다// 누가 울고 있나, 유리창/ 모서리 축축하게 젖는// 몇 개의 선분으로 쓱쓱 완성되는 얼굴/ 이제 그만 지워줄 수는 없겠니?/ 어제는 얼굴이 꿈으로 찾아왔다/ 꿈에는 어둠과 빛이 똑같이 모자라다//(중략)// 창문 밖에서 누군가의 커다란 입술이/ 나무처럼 부풀어 나를 대신 읽는다// 전갈좌에서 양자리로 물병자리에서 도마뱀좌로…/ 혁명에 실패한 소녀들이 선로 위로 쓰러지는 밤// 창문―비명 흩어지듯 쏟아지는 별들/ 선로 위에서 돌돌 우는 바퀴들// 울기 직전과 다음은 어떻게 다른가/ 정말 다른가// 문을 열면/ 차디찬 누군가의 얼굴 조각이 내 얼굴 위에 스며든다/ 좋은 피냄새다”(김경인, ‘눈을 뜨고 모든 밤’ 부분)
시인은 “모서리 축축하게 젖는” 유리창 주위로 모여들다 흩어지기도 하는 각종 소리들, 이를테면 빗물이 쓱쓱 창문에 형해를 남기는 소리랄지, 창밖으로 “비명 흩어지듯 쏟아지는” 별들의 소리, 선로 위에서 바퀴가 움직이는 소리 사이에서 묻는다. “울기 직전과 다음은 어떻게 다른가” “정말 다른가.” 밤은 눈을 감아야 하는 시간대이지만, 시인은 일부러 ‘눈을 뜨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의 정체를 묻는 것이다. 그로부터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울기 직전과 다음은 어떻게 다른가, 다르지 않다면 왜 다르지 않으며, 다르다면 왜 다른가. 정말 다른가. 아니, 달라야 하는가. 진실을 감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시는 ‘일부러 틀리게’ 가기도 하는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20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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