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재난기본소득인가 뉴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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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5-04 17:00 조회12,3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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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마음과 몸이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식욕도 떨어졌다. 우리 삶의 터전이 치명적으로 무너지지 않나 하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3월 하순을 지나면서 조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총선 일정도 치러내고 있다. 이나마 헤쳐 지나온 길에 작은 촛불을 켜고 싶다.
코로나 위기는 전염병이라는 외부충격에 의한 자본주의 순환 위기다. 코로나19에 의해 이동이 제한되고 경제활동의 순환이 멈춰서면서 시스템이 위축되었다. 중국이 우한을 봉쇄할 때는 중국과 연결된 공급망이 교란되는 정도였다. 미국과 유럽에 코로나19 확산이 진행되면서 위기는 전면화되었다. 미국 연준이 ‘빅컷’ 카드를 내놓고 상원이 ‘지원·구제·경제안전법’을 의결하던 때가 중대 고비였다. 이때 한국에서는 시민·의료진·공무원들이 낙동강전선을 지켜내고 있었다.
금융적으로는 2020년 3월 중하순에 붕괴 위기의 저점을 일단 통과했다. 향후 코로나19를 적절히 통제한다면, 6~7월에 산업적 저점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2020년 말~2021년 초에 세계경제는 일상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병원균이 스페인독감처럼 몇 차례 파도로 밀려와 충격이 계속되는 것이다.
미국은 방심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세 차례 긴급조치를 통해 재정자금 투입을 결정했다. 세 번째의 2조달러 프로그램 내용은 기업대출 454억달러, 소기업대출 349억달러, 가계 현금지급 301억달러, 실업보험 250억달러, 세금 연기와 만기연장 221억달러 등이다. 특히 가계 직불금이 부각되었지만, 이는 봉쇄상황을 반영한 구호 프로그램이다.
미국의 현금지급 프로그램을 기본소득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기본소득의 원래 개념은,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평생 규칙적인 현금지급을 보장하는 것이다. 재난은 규칙적 기본소득의 제도화를 어렵게 한다. 미국의 현금지급은 워낙 다급한 상황에 몰린 것을 의미한다. 기본소득이 추구하는 자유·평등의 지향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 미국이 막대한 국채를 발행하는 것은 타국의 자금을 빨아들이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도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독일 등은 고용유지, 실업지원, 소상공인 보조 등에 재정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유럽에 비해서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편이다. 구호를 넘어 적극적 산업정책에 재정을 투입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먼저 지방정부 차원에서 장기적 투자계획을 공표하고 있다. 3월 들어 7개 성(省) 정부에서만 사회간접자본 중심으로 25조위안(약 4250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투자계획을 공표했는데, 2020년 집행분이 3조5000억위안(595조원)이다. 다른 성 정부의 투자계획도 이어질 것이다. 이와 별도로 중국 국무원은 소비부양책과 IT 분야 투자계획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위기 상황에서 증세는 어렵다. 환율을 방어해야 하니 화폐를 마구 찍어낼 수도 없다. 국채 발행이 재정자금 투입의 주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한계가 있다. 작년 GDP가 1914조원이었다. 만약 GDP의 5%를 뉴딜 재정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100조원이다. 이는 구호·회복·개혁을 추진하는 뉴딜 프로젝트에 전략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과 기업을 선별해 집중 구조해야 한다. 신산업 분야에 공유자산을 형성하는 데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전 국민에게 100만원씩 현금지급하면 50조원이 든다. 이는 복지와 혁신체제를 확장할 기회에 쓰여야 할 돈이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적 자원배분이 허용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전략적 선택을 포기하면 국가와 정치의 역할도 포기하는 것이다. 정부·기업·시민사회가 새로운 합의·계약을 맺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과연 민주적·공화적 뉴딜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국은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신문 2020년 4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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