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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시대 안에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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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5-21 16:30 조회11,9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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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민주항쟁이 40년을 맞았다. 올해는 4·19 민주혁명 60주년이며,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 있었던 1970년 11월13일로부터도 50년이 되는 해다. 2020년은 코로나의 해로 기억되기 쉽겠지만, 우리 민주화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중대한 사건들을 특별한 시간의 감각 속에서 기억하고 기리는 해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집에서 받아 보던 조간신문 1면 중간쯤에서 ‘광주사태’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무서운 느낌의 한자 활자로 인쇄된 ‘폭도’, ‘유언비어’ 같은 단어가 또렷이 기억난다. 계엄하의 언론이 전하는 통제된 정보 외에 광주의 실상에 대해 전혀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이들이 ‘폭도’가 아니란 것쯤 알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이듬해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학교에는 ‘새 시대’ 운운하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기 시작했는데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포스터에 몰래 칼을 대기도 했다. 그 무렵 신문 사회면에는 대학생의 집시법 위반 구속 기사가 1단으로 조그맣게 실렸다. 그러면 거기 적혀 있는 이름들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얼굴을 떠올려보는 게 나로서는 이상하게 가슴 설레고 막막한 일이 되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학내 시위를 접하고 사복형사들에게 짓밟히며 끌려가는 시위 주동 학생을 멀리서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던 것 같은데, 무섭기도 했겠지만 분하고 서럽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세대에게나 역사나 정치에 대한 나름의 느낌과 시각을 형성하는 계기가 있게 마련이라면, 내게는 ‘광주’가 그러했던 것 같다.

 

최근 비평가,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다 세상을 뜬 존 버거에 대한 평전을 인상 깊게 읽었다(<우리 시대의 작가>, 미디어창비). 젊은 시절 사회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며 맹렬하게 미술 비평을 전개했던 존 버거는 ‘이상적인 비평가, 싸우는 비평가’라는 글에서 비평가의 역사적 시야와 관련된 흥미로운 생각을 전한다. 장기적인 역사관은 시대 바깥에 스스로를 세우면서 전반적으로 옳은 의견을 낼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은 잘 보지 못한다. 반면, 제한적인 역사관은 당장의 흐름 전체에 열려 있고 거기에 공감하는 데 능하지만, 옥석을 가리는 데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두 접근법의 적절한 조합인데,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곳에(역사 속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비평이 훨씬 겸손한 자리로 갈 것을 제안한다. 두 겹의 눈을 갖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장의 예술에 대해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질문을 하자는 것이다(물론 이 과정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천재’의 작품을 몰라볼 수도 있다). 그가 자기의 시대 한가운데서 찾아내 던진 질문은 이렇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회적 권리를 인식하고 요구하도록 돕거나 권장하는가?’ 그의 적들이 몰아붙였듯 존 버거가 예술을 도구나 선전의 자리에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찾았던 것은 예술이 세계를 보는 방식 속에 간접적으로 혹은 잠재성의 형식으로 보존되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희망의 형식은 역사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질문 혹은 약속으로 의미화되기도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존 버거에게 자기 시대는 개인의 사회적 권리와 예술의 사회적 의미가 좀 더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였을 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은 1959년에 발표된 것인데, 격렬한 문화적 투쟁의 전선에서 물러나 제네바 인근의 산악 마을에 살며 자연과 농민의 시간, 육체적 노동이라는 조금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관심이 옮겨간 1985년의 글에서도 그는 자신의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다만 그는 “예술의 다른 얼굴은 인간의 존재론적 권리라는 질문을 제기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존재론적 권리’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은 별도의 과제로 하더라도, 있을 수 있는 이율배반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계속 붙잡아 담금질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는 신념의 지속과 갱신은 감동적이다. 어떤 말은 그냥 가져다 쓸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존 버거는 그의 ‘시대’ 안에서 살았던 것 같다.

 

존 버거는 1959년의 글에서 예술에 부여되는 사회적 의미를 폄하하는 이들을 향해 한마디를 남긴다. “그들은 자기가 옳은 시대를 살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시대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는 말은 생각 이상으로 무겁고, 많은 겸손의 사유를 요구하는 명제인 듯하다. 4·19, 전태일, 5·18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깊은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20년 5월19일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56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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