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 세상의 절반이 멈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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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5-04 16:41 조회12,3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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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 ‘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문학동네, 2020)
일찍이 진은영 시인이 “세상의 절반은 노래/ 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세상의 절반’,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라고 하면서 일상의 가청권으로 포착 가능한 목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을 향해 경종을 울렸었다면, 최근에 첫 시집을 낸 주민현 시인의 시 ‘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은 우리의 과오로 안 들리는 줄로만 알았던 그 노래가 문득 멈춰버리고, 정말로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그린다. 시는 분명 친근한 어투로 ‘~한다면’이라는 가정법에 기대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어쩐지 이 가정법으로 이루어진 상상은 가정만으로 그칠 게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중의 우리에게 일어날 법도 한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미끄러질 때/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지// 한쪽 눈을 감고 타도 좋아/ 기울어진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규칙// 그러나 오늘은 우리의 식탁을 멈추고서/ 부드러운 날씨로 상을 차리겠네// 유치원의 문을 닫고서/ 푹신한 구름으로 운동장을 만들겠네// 계산원이 없다면 마트는/ 항의와 전화로 창문에 조금씩 금이 가겠지// 아무도 간호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보지 않는다면/ 공장으로 출근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일을 멈춘다면/ 세상의 절반으로만 눈이 내리겠지// 세상에 의자가 없다면/ 모두가 엉거주춤 서 있는 우스꽝스러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맨발로 길을 걸어가는 슬픔// 세상의 절반이 멈춘다면/ 신호등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겠지//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서/ 녹슨 철봉에 귀를 대고 있으면// 구름과 함께 천둥이 몰려오는 소리/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뛰어오는 소리// 뒤돌아보면/ 마트에서 유치원에서 병원에서/ 엉거주춤 서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눈을 감으면/ 운동장 위로 비스듬히 쌓아올린 의자들// 발로 차면 그 의자들 굴러떨어지는 소리// 눈을 뜨면 기울어진 얼굴 위로/ 고독한 맨발 같은 눈이 내리지”(주민현, ‘오늘 우리의 식탁이 멈춘다면’ 전문)
세상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마트에서’, ‘유치원에서’, ‘병원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식탁에서’ 주위를 돌보고 살뜰히 챙겨왔던 이들이 사라진다면, ‘창문에 금이 가’고, ‘천둥이 몰려오는’ 정도의 소동만이 아니라 코로나19 정국에서도 조심스레 건사하는 중인 모두의 일상이 무너질 것이다. 세상 구석구석을 돌보는 사람들의 힘을 우습게 여기고 “발로 차면” 이들이 버티기 때문에 계속될 수 있었던 모두의 삶이 와르르 “굴러 떨어”질지도 모른다.
올해 노동절에는 불황이 걱정되니 몇몇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뻔한 의견이 실린 뉴스가 아니라,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만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소식을 접하고 싶다. 때마침 “세상의 절반이 멈춘다면” 벌어질 상황을 노래하는 시인의 언어는 춤추는 이의 몸처럼 활달한 느낌을 주고, 이 춤은 “고독한 맨발”을 하고 혼자서 춰야 하는 게 아니므로.
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20년 5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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