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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국가의 시간, 인권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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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6-18 16:07 조회11,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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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시간이 오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국가의 회귀를 요청하는 소리가 높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이젠 상식처럼 취급된다. 국가의 확장개업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오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상승세를 탔다. 단기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 추세다.

 

국가가 재난지원금을 개인들에게 직접 지급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한국판 뉴딜도 공식화되었다. 그린뉴딜까지 얹어서 큰돈을 쏟을 것이라 한다. 그린뉴딜이 막판에 포함되긴 했어도 그것의 방점이 녹색전환에 찍혔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후위기에 본격적으로 대응하려면 훨씬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국가의 총력체제를 가동해야 한다.

 

기본소득 논의도 불이 붙었다. 그것의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 사람들 귀에 솔깃하게 들리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재난지원금으로 이미 약효를 본 상태다. 여론조사에서도 기본소득 찬성 비율이 높게 나오고 보수권에서도 거론하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전면적인 전국민 고용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의 대체냐 보완이냐, 그리고 전국민 고용보험의 폭과 속도에 따라서 차이가 나겠지만, 어쨌든 많은 이들이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와 함께 재원을 마련할 방법론을 고민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국에서 증세는 일종의 천기누설형 금기어였는데 이제는 증세를 공개적으로 논해도 역적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의 물꼬는 터졌다. 탄소세, 데이터세, 로봇세, 토지보유세 등으로 재원을 만들자고 한다. 전국민 매달 60만원 수준으로 지급하려면 108조원 정도의 순증세가 필요하다는 진단도 제시되었다.

 

금융과 무역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퇴조하고 있는 것도 국가의 귀환을 재촉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람들을 ‘자유’ 시장으로 몰아넣은 뒤,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는 식의 방임형 경쟁 정책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국가의 귀환이 2차대전 뒤 서구 복지국가 전성시대를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당시 국가는 노동운동 및 사민주의 정치와의 역사적 타협을 통해 시민들에게 ‘마음 좋은 삼촌’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시민들은 개인이라기보다 노동조합원, 교사, 사회복지사, 간호사, 공무원과 같은 공공부문 일꾼으로서 국가와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온정주의라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국가는 어쨌든 복지체제를 통해 사람들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 주었다. 나라에 따라서 공공재냐 권리냐 하는 차이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덜 팍팍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국가의 귀환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이나 사민주의 정치가 과거와는 다르고, 공공부문도 예전과는 다른 수익구조와 조직문화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존재하던 조직화된 완충지대가 크게 줄어든 상태에서 21세기의 국가 개입은 개별 국민에게 수직적으로 혜택을 내리꽂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서구 복지국가의 국민은 집단에의 귀속성을 가진 존재이자, 국가와 동질성을 많이 공유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개별화된 소비자 정체성을 갖고 있고, 어떤 조직에 속하는 것을 자유의 제약으로 여기곤 하는 정서를 지니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비슷한 양상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연대’라는 말이 상당히 부정적 어감으로 들리는 현실이 이 점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요컨대 ‘국가의 시즌2’는 과거 복지국가와는 많이 다른 구도와 감수성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의 재등장은 인권에도 큰 영향을 준다. 국가가 커질 때 인권의 자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좋은 조짐인가, 복합적인 조짐인가, 나쁜 조짐인가. 이 모든 조짐을 하나로 묶어 21세기형 ‘국가의 시간’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커진다는 것은 결국 국가 재정의 비중이 늘어나고, 그것을 집행할 조직과 인력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국제인권운동에서는 ‘정부 예산과 인권’이라는 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실에서는 이 방면의 매뉴얼까지 만들어 각국 정부에 보급하고 있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 문헌은 뭐니 뭐니 해도 예산편성 내역인데, 하물며 국가가 커진다면 예산편성이 인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는가.

 

이때의 예산편성은 인권과 직접 관련된 예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예산이 인권의 렌즈를 통해서 편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말해, 정부가 모든 사람의 모든 인권을 잘 보호하려면 예산을 인권적으로 잘 편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유엔에서는 정부의 예산편성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인권이라고 본다. 국제인권기준에 나와 있는 국정 참여권리, 정보 접근권, 그리고 정부의 책무성을 물을 수 있는 권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주장은 인권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귀에도 파격적으로 들릴 것이다.

 

흔히 자유권은 정부가 시민들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기만 하면 보호될 수 있으므로 자원이 크게 소요되지 않는다는 통념이 있다. 꼭 그렇진 않다. 사법부 독립, 민주적이고 유능한 경찰, 인도적인 교정시설을 위해 예산이 많이 필요하다.

 

사회권에는 더욱 큰 규모의 자원이 필요하다. 특히 국가가 커지는 시대에는 사회, 보건의료, 교육, 여성, 아동, 복지, 환경 등이 단순히 공공정책인지, 수급권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권 정책인지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사회권 정책으로 간주하는 경우에는 예산안 편성 시 사업유형별 지침의 작성 방법 자체를 바꿔야 한다.

 

유엔은 예산이 많이 필요한 ‘예산집약형 인권’과, 예산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예산함축형 인권’을 나눠서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예산집약형 인권은 특히 정부의 적극적 의무와 전향적·지속적 달성이 필요한 인권이다.

 

자칫 예산편성 자체가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예산편성 방식에서 인권적 고려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다. 차별적으로 예산을 짠다거나 퇴행적, 축소지향적으로 예산을 짤 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인권적 차원이 빠진 예산편성은 경로의존형 정책집행으로 이어져 정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권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국가의 시간이 도래한 시대에는 기획재정부처럼 예산편성을 책임지는 부서에 인권의 정신이 들어가야 한다. 패러다임 변화라는 말이 요즘처럼 맞아떨어지는 시대도 없다. 인권운동도 국가의 성격이 천지개벽하고 있는 현 시대상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국가의 시간이 오면 자원 배분의 관문이 인권의 자리가 된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신문 2020년 6월16일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96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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