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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북 치는 소년과 마지막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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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1-10 16:41 조회16,2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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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우편물을 뜯어보니 어느 문화재단에서 보낸 연하장이다. 나뭇잎을 꽃처럼 그려놓은 그림이 환하다. 인쇄된 새해 인사도 아침에 읽는 첫 언어로는 괜찮다. 이제는 단체 이름으로 발송되는 이런 식의 연하장이 거의 다지 싶다. 지난가을 부산에 갔다가 예전 살던 동네를 찾았다. 좁은 동네 골목을 한참 걸었다. 어릴 적 친구의 집 앞을 지나는데 성탄절 무렵 카드를 만들어 문틈으로 밀어 넣던 기억이 났다. 어둑한 저녁, 카드를 품에 넣고 골목을 돌던 아이의 부끄러워하는 등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문방구에서 산 카드에 크레용으로 색을 칠했을 것이다. 적어 넣은 글이라야, ‘누구야 매리(mary) 크리스마스’ 정도였을 테다.(괜히 영어로 썼던 것 같은데, 난 오랫동안 ‘메리’(merry)라는 단어를 몰랐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김종삼, ‘북 치는 소년’) 시의 제목에 나오는 ‘북 치는 소년’은 크리스마스카드의 어린 양들 그림 속에 있는 것이겠지만, 카드의 아름다운 그림에 낯설어하는 ‘가난한 아희’(고아원의 아이였을 수 있다)의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에도 함께 깃들어 있을 것이다.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것이 왜 흰 눈이 아니고 진눈깨비여야 했을까.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지금 소년의 골목에 내리는 진눈깨비와 함께 궁핍한 현실의 대비를 아프게 환기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는 그 카드에 얼마간 남아 있는 구원의 약속을 다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연말의 술자리 사이로 책 한권을 들고 다니며 읽고 있다. <아도르노-벤야민 편지: 1928∼1940>는 제목 그대로 독일의 두 사상가가 주고받은 편지 묶음이다. 이 시기 벤야민(베냐민)은 파리에 혼자 머물며 극도의 경제적 궁핍 속에서 연구와 집필을 이어가고 있었고, 호르크하이머가 주도하는 ‘사회연구소’의 핵심 멤버로 베를린, 런던, 미국으로 옮겨 다니며 저술 활동을 하고 있던 아도르노는 조금은 나은 형편이었던 듯하다. 기실 두 사람의 편지는 점점 임박해오는 나치즘의 기운, 파국을 향해 치닫는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우려 가운데서 서로의 사유를 교환하고 집필을 격려하는 내용 못지않게 벤야민의 긴박한 경제적 구조 요청과 이에 대한 아도르노의 다각도의 지원 방안 모색이 거의 매 편지의 핵심 사안을 이루고 있다. 벤야민은 여력이 있는 지인을 알아봐준 아도르노에게 감사하며 쓴다. “그런 식으로 정기적인 도움을 주신다면, 그 도움은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그 기부자들께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그런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난 몇달 동안 처했던 상황에서 가장 파괴적인 것은 당장 코앞의 며칠도 내다볼 수 없는 완벽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편지라는 형식으로만 가능하리라 싶은 마음의 어떤 드러냄이었을 수도 있다. “밤에 잠을 잘 못 잡니다. 늦게 잠들었다가 일찍 깨어납니다. 이 편지로 생제르맹의 종소리로 깨었다가 빗소리로 다시 잠드는 하루의 첫 순간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 편지를 썼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 신입생 때 처음에는 부모님께 꽤 긴 편지를 썼던 것 같다. 결국에는 돈을 좀 부쳐달라는 반복되는 용건이 스스로도 계면쩍어지면서 그만두고 말았지 싶다. 그 무렵이라면 부치지 못한 편지도 몇장 있을 법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카드도 편지도 이젠 내게는 거의 잊힌 사물일 뿐이다.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편지에는 ‘변증법적인 상(像)’이라는 말이 여러차례 나온다. 깊은 함의는 잘 모르는 대로, 꿈의 형상과도 관련된 그 말을 벤야민은 ‘깨어남’이라는 계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잊힌 것, 버려진 것 안에서 돌출하는 ‘깨어남’의 장소, 시간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이 나눈 편지야말로 이제는 망각에서 일깨워지고 ‘지금-시간’과 결속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변증법적인 상’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북 치는 소년’이 받았던 카드처럼. 1940년 9월25일 벤야민은 피레네산맥의 작은 마을에서 망명길 동행이었던 한 부인에게 모르핀을 삼킨 상태로 마지막 편지를 구술한다.(긴박한 상황에서 편지는 바로 폐기되었다가 그 부인이 훗날 기억을 돌이켜 아도르노에게 전했다.) “부탁건대 내 친구 아도르노에게 내가 처했던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쓰고자 했던 말들을 쓸 시간이 내게는 충분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또 한해가 가고 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12월24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22017.html#csidx9c6b28a6866e2609fd0975b3af90cef onebyone.gif?action_id=9c6b28a6866e2609fd0975b3af90c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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