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관]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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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2-13 14:32 조회14,4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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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부터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낮아짐으로써 고3 학생 가운데 일부가 선거권을 얻게 된 것을 두고 교실이 정치화된다는 식의 반대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그에 비해 그동안 선거에서 배제되었던 일부 대학생들이나 사회인들이 선거권을 얻게 된 사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학생이나 사회인임에도 투표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정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선거 연령 하향이 ‘비정상의 정상화’임은 분명해진다. 이같은 변화가 대학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삼 대학에서 학생이 누구인지를 묻게 된다. 과연 현재 대학생들의 입지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대학은 흔히 학문과 교육의 공동체라고 불린다. 여기서 이 공동체의 주된 구성원은 교수와 학생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의 학문연구는 대개 교수들의 영역이고 학생들은 가르침의 대상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학위를 얻기 위해서는 대학의 규정에 따라서 일정한 학점을 따야 하고, 교수는 평가에 관한 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그렇지만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원래 의미와는 어긋난다. 학생들도 교수와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교육의 주체로서 교실에서의 토론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학이 이같은 공동체적인 의미를 망각하고 학생을 단순히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이 정상일까?
근래 들어 교수들의 위상에도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고 한다. 교수들은 위로부터는 통제와 간섭에 시달리고 아래로부터는 권위의 도전을 받고 있다. 교수의 ‘갑질’이 사회의 따가운 논총을 받고 교수사회도 ‘미투’ 운동의 여파를 피해가지 못한다. 이같은 흐름 앞에서 존경받는 스승으로서의 교수의 위상은 이제 과거의 전설로만 남게 될 지도 모른다. 교수들로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더불어 학생들과의 관계가 이처럼 불편해지고 갈등하게 된 현실이 과연 정상적인가 묻고 싶을 법하다. “요즘 학생들은 과거와는 너무 다르다”라는 말은 교수들의 대화자리에서 너무나 흔하게 들린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면 학생들이 변했다기보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편이 더 합당하고, 더구나 교수인 나 스스로가 젊은 시절과는 달라졌다는 편이 더 맞을 듯하다. 사실 갑질 논란이든 미투 사건이든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것은 마찬가지고, 과거에는 문제되지 않았던 관행이 시대변화와 함께 부당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아무리 인정하기 어렵더라도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무능력과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함을 자책하게 된다.
대학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학생들의 입지는 어떤가? 교수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과거보다 높고, 대학평의원회나 등록금심의위원회 등 대학 거버넌스에서의 법적 지위도 얻고 있는 점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고 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또한 객관적으로 보자면, 대학의 운영전반에 대한 결정권은 교수진 가운데서도 정규직 교수가 독점하고 있고, 학생들을 비롯한 여타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과소 대변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서구의 경우 프랑스는 68혁명 이후 학생들의 대학운영 참여를 보장했고, 독일은 학생이 운영협의회의 3분의 1의 지분을 가진다는 원칙을 세운 바 있다. 또한 교과과정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교수들과 같이 협의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두 나라의 학생들은 거의 무상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다. 반면 21세기의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은 과중한 등록금을 납부하고도 이들에게 보장된 권리는 봉쇄되어 있다. 과연 이것이 정상일까?
대학의 문화나 관행을 포함하는 기득권 구조는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변화시키기는 일은 단순치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갑질 논란이나 미투 사건은 과도기가 겪는 진통이라고 이해해야 할 법하다. 필자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대학의 변화는 무엇보다 교수들이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을 학생, 비정규교수 등 대학의 주변부로 밀려 있는 구성원들과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권력관계에서의 하위자로 보지 않고 공동체의 평등한 성원으로 바라보는 데서 이런 변화의 단초가 열릴 것이다.
대학은 흔히 학문과 교육의 공동체라고 불린다. 여기서 이 공동체의 주된 구성원은 교수와 학생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의 학문연구는 대개 교수들의 영역이고 학생들은 가르침의 대상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학위를 얻기 위해서는 대학의 규정에 따라서 일정한 학점을 따야 하고, 교수는 평가에 관한 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그렇지만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원래 의미와는 어긋난다. 학생들도 교수와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교육의 주체로서 교실에서의 토론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학이 이같은 공동체적인 의미를 망각하고 학생을 단순히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이 정상일까?
근래 들어 교수들의 위상에도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고 한다. 교수들은 위로부터는 통제와 간섭에 시달리고 아래로부터는 권위의 도전을 받고 있다. 교수의 ‘갑질’이 사회의 따가운 논총을 받고 교수사회도 ‘미투’ 운동의 여파를 피해가지 못한다. 이같은 흐름 앞에서 존경받는 스승으로서의 교수의 위상은 이제 과거의 전설로만 남게 될 지도 모른다. 교수들로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더불어 학생들과의 관계가 이처럼 불편해지고 갈등하게 된 현실이 과연 정상적인가 묻고 싶을 법하다. “요즘 학생들은 과거와는 너무 다르다”라는 말은 교수들의 대화자리에서 너무나 흔하게 들린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면 학생들이 변했다기보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편이 더 합당하고, 더구나 교수인 나 스스로가 젊은 시절과는 달라졌다는 편이 더 맞을 듯하다. 사실 갑질 논란이든 미투 사건이든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것은 마찬가지고, 과거에는 문제되지 않았던 관행이 시대변화와 함께 부당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아무리 인정하기 어렵더라도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무능력과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함을 자책하게 된다.
대학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학생들의 입지는 어떤가? 교수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과거보다 높고, 대학평의원회나 등록금심의위원회 등 대학 거버넌스에서의 법적 지위도 얻고 있는 점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고 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또한 객관적으로 보자면, 대학의 운영전반에 대한 결정권은 교수진 가운데서도 정규직 교수가 독점하고 있고, 학생들을 비롯한 여타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과소 대변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서구의 경우 프랑스는 68혁명 이후 학생들의 대학운영 참여를 보장했고, 독일은 학생이 운영협의회의 3분의 1의 지분을 가진다는 원칙을 세운 바 있다. 또한 교과과정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교수들과 같이 협의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두 나라의 학생들은 거의 무상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다. 반면 21세기의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은 과중한 등록금을 납부하고도 이들에게 보장된 권리는 봉쇄되어 있다. 과연 이것이 정상일까?
대학의 문화나 관행을 포함하는 기득권 구조는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변화시키기는 일은 단순치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갑질 논란이나 미투 사건은 과도기가 겪는 진통이라고 이해해야 할 법하다. 필자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대학의 변화는 무엇보다 교수들이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을 학생, 비정규교수 등 대학의 주변부로 밀려 있는 구성원들과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권력관계에서의 하위자로 보지 않고 공동체의 평등한 성원으로 바라보는 데서 이런 변화의 단초가 열릴 것이다.
윤지관 덕성여대 명예교수
교수신문 2020년 2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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