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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빛바랠수 없는 '아우슈비츠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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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1-29 10:44 조회15,8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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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월요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해방’ 75주년이 된 날이었다. 2차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에 소련군이 강제수용소에 진주했던 날을 기리기 위해 유엔은 1월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지정했었다. 특별히 올해엔 전세계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공식 추모기관인 야드바솀이 주관한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국제행사였다고 한다.

 

러시아 대통령, 프랑스 대통령, 독일 대통령, 미국 부통령, 영국 왕세자 등 40여개국 정상이 모여 한목소리로 이런 비극이 절대로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인들이 으레 내놓는 수사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이런 비극이 절대로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불길한 경고처럼 들리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혐오와 증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반유대주의, 반동성애, 반난민, 반장애인, 반여성의 언행이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홀로코스트를 추모하는 일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각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지난달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크게 졌던 패인 중 하나가 당내 반유대주의 경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었다. 미국에선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네오나치를 표방하며 조직을 넓혀가고 있다. 유대교 회당을 공격하고 가정집을 습격해 살인을 저지른다. 며칠 전엔 ‘더 베이스’라는 극우단체의 활동 양상이 폭로되기도 했다.

 

독일에선 반유대주의가 이제 일상적 걱정거리가 됐을 정도다.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야 ‘뭐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겠지’라고 할지 몰라도 막상 당사자가 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반유대주의 언동을 일삼는 자들이 유대인만 표적으로 삼는 건 아니다. 나쁜 짓들은 유유상종으로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극우파들이 한꺼번에 발호하는 듯하다.

 

야드바솀의 추모행사는 과거사 청산의 어려움을 또다시 보여준 자리이기도 했다. 원래 참석하기로 했던 폴란드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는 연설 차례를 주면서 자기에겐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아예 불참을 선언해버렸다. 사실은 최근 러시아 쪽에서 2차대전 발발에 폴란드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식의 역사관을 내세운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과거사, 특히 전쟁이 얽힌 과거사를 정리하는 과제가 얼마나 풀기 어려운 매듭인지 상기하게 한다.

 

추모행사장의 모습을 다룬 기사 중에 유독 눈길을 끌었던 대목이 있다. 행사장 바깥에서 시위대가 ‘홀로코스트 파티를 집어치우라’는 펼침막을 내걸었다고 한다. 빈곤에 시달리는 고령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정부가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그 뒤 어떤 삶을 살아야 했던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방대한 연구주제 중 하나가 생존자들에 관한 것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기 직전 상태에서 해방된 유대인 중 몇주 내로 사망한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다. 나머지 25만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 급히 마련된 이산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되돌아갈 동포 공동체와 재산이 사라졌고 일가친척의 생사도 모르는 상태였다. 강제수용소에 갇히지 않았던 유대인들까지 합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살아남은 사람들’(셰리트 하플레타)이라고 불렀다. 실종된 이산가족을 찾아주는 적십자사의 국제심인서비스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산민 캠프에 지내던 사람들은 1950년대 초까지 모두 외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을 택했고 나머지는 미국 등으로 갔다. 마침내 죽음의 땅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곧바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생존자 증후군’이라는 고통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다.

 

생존자들에게는 심신의 피폐, 외상 후 스트레스, 사회 부적응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2세들에게도 정신질환이 일반인들보다 높은 비율로 발생했다. 연구에 따르면 생존자의 가족 내에서는 ‘무언의 커넥션’이 작동한다고 한다. 부모의 과거지사를 말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그러나 다들 짐작하는― 어떤 침묵의 불문율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간 생존자는 동포들 사이에서도 자기가 유럽에서 겪은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생존자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내도 ‘순한 양처럼 그런 일을 당하고만 있었느냐’는 식의 눈총을 받기 쉬웠다. 나치에 부역을 하여 살아남은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다. 1960년대 초 아이히만 재판이 있고 나서야 과거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만들어졌다.

 

강의 시간에 이런 설명을 하면 요즘 학생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 피해를 당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피해자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의 사고방식이다. 피해를 당한 사람의 고통은 그것이 아무리 분명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세상 속에서 인정투쟁을 거치면서 힘들게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강제징용 노동자, 민주화 희생자, 산재 피해자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았고 독일과의 배상·보상 과정에서 문제도 있었다. 1952년 독일은 이스라엘과 ‘룩셈부르크 합의’를 통해 일단 15억달러를 생존자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 돈을 공식 창구를 통해 받았는데 1953년 이전에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생존자들만 신청이 가능하다는 원칙을 세우는 바람에 늦게 도착한 생존자들은 재정 지원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그 뒤에는 ‘국제 유대인 피해청구 회의’라는 단체를 통해 독일의 추가기금을 피해자들에게 직접 지원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금의 전용, 투명성 논란이 일었다. 몇해 전 이스라엘의 복지부 장관이 홀로코스트 생존자 중 약 2만명이 그때까지 단 한푼의 배상금이나 복지 혜택도 받지 못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복잡한 관료제, 무관심한 공무원들, 수많은 유관기관의 무능력이 겹쳐져 생존자들이 빈곤과 방임을 겪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약 20만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는데 그중 3분의 1 내지 4분의 1이 빈곤층이라는 보고도 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같은 동포의 나라에서 받은 처우가 이 정도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던가. 여기서 우리는 인권의 보편성이란 게 결국 인간 고통의 보편성과 동의어임을 깨닫게 된다.

 

마침 1월30일부터 3월22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이 이스라엘의 야드바솀과 함께 ‘아우슈비츠 앨범―아우슈비츠 지구의 한 장소’라는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희귀자료들이 공개될 예정이다. 인권을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어린이, 청소년, 학생들에게 인생을 바꿀 경험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오는 4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18살 유권자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민주-인권 시민의 역사의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신문 2020년 1월28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25944.html#csidxf4c38500799abe7b8b5cc27e5829d57 onebyone.gif?action_id=f4c38500799abe7b8b5cc27e5829d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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