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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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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5-04 16:39 조회12,2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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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인간이 낯선 것을 접촉하는 것에 본능적인 혐오와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주변 공간에 거리를 두려는 것은 접촉 공포 때문이라는 것인데, 우리가 평소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돌아보면 얼마큼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간이 접촉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경우는 군중 속에 있을 때다. 군중 속에 놓이는 순간 인간은 서로 몸이 닿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카네티는 그 이유를 평등의 느낌에서 찾는다. 접촉 공포는 타자와 구별되고 차이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이면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오는 피로감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간격의 고수는 자유의 제한이기도 하다. 군중 안에 있을 때 그러한 구별과 차이는 일시적으로 지워지며 해방감이 온다. 민 자가 곧 밀린 자이며, 밀린 자가 곧 민 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아무도 남보다 위대할 것도 나을 것도 없는 축복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 인간은 군중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카네티의 ‘접촉 공포’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에 인상적으로 읽은 시 한 편 때문이다. 백무산 시인의 ‘무게’라는 시인데, 시내버스에서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일로부터 시인은 뜻밖의 느낌과 마음이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본다. 시의 화자는 시내버스에 앉아 졸고 있다. 퇴근길 만원버스인 듯하다. 의자에 바투 붙어 서 있는 다른 승객 또한 선 채로 피곤에 겨워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차가 갑자기 기우뚱 쏠리자 “서서 졸던/ 살찐 사람의 무게가 사정없이 내 가슴을 밀어붙인다” 이럴 경우 대개는 짜증이 일기 쉬운데, 어찌 된 일인지 생각지도 못했던 느낌이 피어오른다. “그 당황한 무게의 여운이 얼룩처럼/ 몸에 남는다 연민처럼 번진다” 여기서 핵심은 ‘당황한 무게의 여운’일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몸이 쏠려 자신도 모르게 남의 가슴에 몸을 밀착하게 된 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원버스의 어쩌지 못하는 상황 탓일 뿐이다. 그러나 그이의 무안함과 미안함은 또 그것대로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사과의 말과 행동이 오갔으리라. ‘당황한 무게의 여운’은 이러한 정황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포착해 보여주는 시인의 언어다.

 

그런데 여기서 ‘당황한’이라는 마음의 움직임에 멈추고 만다면, 그래서 이어지는 ‘무게’의 함의를 곱씹어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시 읽기는 충분치 못하리라. 얼룩처럼 남아 있는 ‘무게’는 불쾌할 수도 있는 육체적 접촉의 느낌이 아니더라도 통상 덜어내고 싶은 부정적인 무엇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당황스러움과 무안함의 느낌 안에서 감지된 ‘무게’가 그이가 짊어지고 있는 하루 치의 피곤, 혹은 삶의 짐으로부터 번져온 것이라면? ‘연민처럼 번진다’는 것은 바로 그 느낌을 말한다. 그러니 만원버스 안의 피곤이 빚어내어 시의 화자에게 당도한 ‘무게’는 졸며 앉아 있던 ‘나’와 서서 졸고 있던 ‘그이’를 연결해주는 공통의 무엇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나누었던 무게 안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함께 이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무게라는 연대감으로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적 구호 차원의 ‘연대’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한편으로 몸에 실리고 몸으로 나누는 무게의 실감을 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는 시인이 다음 연에서 “모든 절박한 것은 무게다/ 슬픔의 모든 것은 무게에서 배어나온다/ 견디기만 해왔던 무게/ 들어내려고만 해왔던 그 무게에서”라며 무게의 방향을 전혀 다른 쪽으로 전환하는 것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벗어버리고 싶은 짐짝으로, 우리를 붙들어매는 중력으로, 그리하여 늘 허덕이게 해온 그 무게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은 그렇게 온다. 이 깨달음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여기에는 규범적 차원에서 미리 마련된 생각과 느낌의 울타리가 없다. 일상의 우연찮고 피곤한 작은 사건이 만들어낸 즉각적인 감각의 이야기에서 피어난 예상치 못한 경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시의 화자에게 무게는 ‘쾌활하고’ ‘긍정적인’ 무엇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쾌활한 무게라니/ 묵직하게 실리는 무게의 실감이여/ 긍정적인 무게라니/ 나를 덜어내는 무게라니” 이때 ‘덜어냄’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되,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버스 안의 누군가와 함께하는, 그 당황과 절박함을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코로나의 시절을 지나며 한층 과도해질 가능성이 높은 서로의 짐과 무게를 느끼고 헤아리는 마음의 온축을 생각해보게 된다. 퇴근길에는 서로의 등이 더 많이 보인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20년 4월28일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24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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