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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회고록을 읽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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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5-24 14:33 조회29,1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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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1990)는 민주화 이행기에 제기되는 ‘과거 청산’의 어려움을 깊이 있게 파헤친 작품이다. 정의의 즉각적인 실현은 당연하고 절박한 요구지만 그 진실의 회복 과정에도 역시 따라야 하는 민주주의의 시간과 비용은 문제 해결을 더디게 만들고 때로는 불투명하게 한다. 연극의 마지막에 무대 위로 커다란 거울을 내려 관객들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은 어두운 과거의 청산이 법적 정의를 넘어서는 보다 복잡하고 착잡한 문제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 거울은 작가가 언급한 대로 “타협하지 않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공간을 확립하는 방도”로 고안된 것이었겠지만, 끝내 조국 칠레에서의 초연을 가로막은 불편한 요인이 된다. 최근에 번역 출간된 작가의 회고록 <아메리카의 망명자>(창비)에는 연극 상연의 좌절을 전후해서 다시 조국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가 정직한 자기 해부의 언어에 담겨 있다.

 

아르헨티나 태생 유대인으로 유소년기를 영어와 함께 미국에서 보낸 뒤 열두살 때 칠레로 건너와 스페인어를 쓰는 칠레인으로 자신의 조국을 다시 발명해야 했던 아리엘 도르프만은, 그 자신 혼신을 바쳐 참여했던 아옌데 민주혁명이 좌절된 뒤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을 품은 채 작가로서, 또 혁명운동가로서 긴 망명투쟁의 세월을 보낸다. 민주화 이후 조국 칠레로 귀환하지만 그의 최종 정착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었다. 회고록은 칠레 정착을 시도했던 1990년 여섯달의 시간을 중심에 놓고 망명 이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바깥’(ex)의 시선을 포함하는 ‘망명’(exile)의 의미를 곱씹으며 그 떠돎의 시간을 긍정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역사의 전망이 사라진 뒤 도래한 세계 현실 속에서 ‘공동의 인간성’이라는 인류의 피난처를 찾고 회복하려는 작가의 평생의 결의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회고록의 전편인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이중언어의 여행>(창비·2003)가 또한 그 제목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한 인간의 정체성을 둘러싼 두 언어의 지배 투쟁이 20세기 중후반 남미라는 제3세계 해방정치의 현장에서 진행된 과정은 그의 회고록을 좀 더 특별하게 읽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가 망명지에서 조국의 ‘데사파레시도’(피노체트 독재에 의해 사라진 사람들)를 생각하며 그이들의 현전을 상상력으로, 그리고 언어로 기다리는 장면들은 문학이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 참여하는 간절한 연대의 순간이 된다. 그런데 대학 시절 선거에 의해 출범한 칠레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 혁명을 책에서 처음 접했던 나로서는, 도르프만이 그 혁명의 성공과 좌절을 어떻게 되새기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해방의 경험이 얼마나 충일한 것이었는지, 그 무엇도 지구상의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운명을 되찾는 광경을 지켜보는 희열에 비할 수 없었다”고 쓴다. 그러나 바로 그랬기에 “우리에게 그처럼 신명났던 일이 우리의 낙원의 비전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낀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려웠다”고 말한다. 결국 도르프만은 모네다궁 앞에서 환호했던 젊은 날의 그 자신에게 “국가가, 혹은 혁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뼈아픈 고백은 몇몇 중대한 정치적 실수와 무관하게 아옌데 혁명이 이후 세계 현실의 전개를 읽어내지 못한, “과거의 마지막 헐떡임”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이다. “인간이 정말 어떤 존재인지, 그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자문. 물론 그는 자신의 투쟁을 후회하지 않으며, “젊은이, 저항한 것은 옳았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는 첫번째 회고록을 참혹한 고문의 시간을 시를 반복 암송하며 견뎌낸 한 칠레 여성의 일화를 전하며 끝맺는다. “그녀는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 그녀와 같은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는 한, 나는 그녀의 투쟁할 권리와 우리의 기억할 의무 양자를 옹호할 것이다.”

 

두 권의 회고록을 읽고 있는 동안 1980년의 한 수사 진술서를 둘러싼 이상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만에 하나 고문과 폭압의 수사 과정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한들, 그걸 어떻게 비난할 수 있는가. 그들이 싸웠던 대상은 우리의 인간성을 유린한 그 부도덕한 권력이 아니었나. 정말 필요한 자기반성과 고백의 언어들이 향해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 바로 그 인간성의 옹호에서 보인 ‘편협함’이나 ‘얇음’이어야 할 것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5월 14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3839.html#csidxaf135bc7e08099eb7f3c8a4979aea4c onebyone.gif?action_id=af135bc7e08099eb7f3c8a4979aea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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