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이국땅에서 울리는 한국어와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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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7-11 12:58 조회23,99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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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국문예창작학회가 오스트리아 한인 문우회와 ‘역사와 민족, 언어와 문화’라는 주제로 공동 개최한 문학 심포지엄을 참관했다. 빈 도나우 강변에 자리한 ‘오스트리아 한인문화회관’은 실용적인 형태의 단층 건물로, 한쪽 벽에는 2007년 발의되어 2012년 5월 개관한 한인문화회관의 연혁과 후원자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십시일반의 정성이었다. 2500여명의 많지 않은 교민(그중 700여명은 유학생) 수로 이루어낸 성과라는 데서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나는 것만이 아름다울 테지./ 소리만이 새로운 것이니까 쉽게 죽으니까./ 소리만이 변화를 신고 다니니까.”(기형도, <종이달>) 한국에서 온 한 발표자는 기형도의 시에서 ‘소리’는 ‘살아 있음’을 표명하고 각성하는 매개체이자 ‘살아 있음’을 추동하는 동력이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모네의 ‘수련’을 연상시키는 이국의 호숫가에서 듣는 한국어의 소리는 서울에서와는 조금 다른 공기와 울림 속에서 깨어나고 있는 듯했다. 발표자들의 입에서 박경리, 성석제, 신경숙 등 한국 작가들의 이름이 이상하게 낯선 파동으로 흘러나올 때, 나는 이곳 문우회 분들의 표정을 훔쳐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날의 심포지엄이란 이국땅에서 ‘한국문학’의 소리들, 그 새로운 파장 안에 함께 잠겨보는 시간일 수도 있다. 이때 ‘한국문학’은 그 ‘음성 자질’만으로도 성립한다.
물론 언어는 소리의 파장 안에 역사 혹은 우리가 ‘삶’이라는 모호한 범주로 부를 수밖에 없는 무심하고 잔혹한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종종 돌부리에 채어 넘어지는 곳이 여기이기도 하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돌부리를 뽑고 길을 닦아나가지만 모순의 제거나 해소는 쉽지 않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학 동아시아학연구소에 재직 중인 윤선영 박사는 얼마 전 루마니아 바베슈-보여이대학에서 열린 제4회 한국어말하기대회에 학생들을 인솔해서 참석한 특별한 경험을 발표에 담았다. 윤 박사는 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은 류블랴나대학 한국학 전공 학생 카탸 주판치치의 발표문을 소개해주었는데, 카탸는 자신의 발표(직접 작성한 원고를 외워서 말함)에서 ‘위안부’라는 한국어 표현의 부적절함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위안이라는 말에는 강제성이 없고 매우 개인적이며 그다지 부정적인 이미지도 없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으로서 카탸가 제기하고 있는 정당한 반문은 사실 그이의 녹록지 않은 한국어 학습 능력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다. 사고하고 성찰하는 힘,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특별한 마음의 흐름이 여기에는 있다. 때로는 역사의 시간 안에서, 때로는 지리적 거리 안에서 우리가 다른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혹은 저 강물, 저 하늘, 저 호수에 일렁이는 바람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거기에 우리가 상상하고 지켜가는 인간성의 수원이 있을 것이다. 그 ‘함께’가 결국 유한한 시간 안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똑같은 바람과 똑같은 강물을 다시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한다. 그러면서 “일몰과 종말의 틈 사이에서, 지연되는 긴 이별 속에서 산다.”(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다뉴브>, 이승수 옮김, 문학동네)
한국 정부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제정한 법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을 쓴 것은 피해 생존자분들이 입을 수도 있는 ‘정신적 상처’를 고려한 것인데, 이럴 때 말의 한계와 불완전함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는 것은 사안의 복잡성과 민감성을 여러 차원에서 웅변하는 터이겠지만, 한 외국의 학생이 제기한 상식의 반문을 새삼 소중하게 되새기게 만든다. 카탸 학생의 발표는 이렇게 끝난다. “전쟁은 아무도 위안해주지 않으며 아무도 위안받지 못합니다.” 아베 정권의 보복적 경제 제재는 이 상식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 이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이자 끝이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에 따르면 여행사 요금표의 ‘모든 것 포함’이라는 조항에는 하늘에 부는 바람까지도 포함된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도 같다. 나라면 구름을 빠뜨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는 여행지에서 집에서 떼놓고 온 똑같은 권태를 발견할지라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도 말해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바람과 구름은 내게 너무도 무관심한 채 불고 흘러간다. 한갓 여행자의 감상일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민족들을 느슨하게 아우르는 세계, 합스부르크 왕가가 꾸었던 꿈이란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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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1123.html#csidx8be6c9609f5a602b914f3f424e7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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