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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대여행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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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8-08 14:15 조회21,6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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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가 있었다. ‘대발견의 시대’라고도 한다. 유럽이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표현이지만,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구대륙’과 ‘신대륙’ 모두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느닷없이 ‘발견된’ 쪽에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부등가 교환이 강요된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은 인터넷의 ‘대항해 시대’라고 해야 할까. ‘익스플로러’나 ‘내비게이터’ 같은 말은 예전 시대의 기억을 갖고 있다.

 

인터넷은 공기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이어서, 좀 더 실감 나는 명명을 찾고 싶기도 하다. ‘대여행의 시대’는 어떨까. 일터가 있는 홍대 쪽으로 출근하면서 캐리어를 밀며 오가는 외국인 여행객을 만나는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되었다. 중국, 일본, 동남아 쪽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인 듯하지만, 유럽계 사람들도 많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철도 쪽으로 이동하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 나부터가 얼마 전 비슷한 모습으로 저 대열 속에 있었을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공항철도가 연결되는 경의중앙선 홍대역에서 내려 2호선 출구 쪽으로 나오는 꽤 긴 지하 통로는 내외국인 아울러 공항 방면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3분의 1쯤은 되지 싶다. 우리는 서로서로 여행지로 출근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한동안 이 여행지에서 특정한 한 나라는 빠져야 할 것 같지만). 아니면 그렇게 이국의 여행지로 출근하는 시간들을 기다리며, 일터의 텁텁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화려한 캐리어들의 잔영 탓인지 집에 돌아와서도 여행 채널을 켜놓고 낯선 도시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기 일쑤다.

 

그런데 이상하다. 막상 나가보면 고생이다. 여행의 형태나 방법, 능력과 준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여행지의 세계를 깊숙이 접할 기회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언젠가 유럽의 한 작은 도시에서 다운타운을 벗어나 주택가를 혼자 걸어다니다가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나타났던 적도 있다. 대성당, 광장, 왕궁, 미술관 식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나중에는 거기가 거기 같기도 하다. 어느 바닷가의 유달리 붉은 저녁놀, 가없는 지평선에 붙어 피어오르는 두툼한 뭉게구름, 수확이 끝난 너른 밀밭 언덕과 한 그루 사이프러스, 드문드문 눈을 인 채로 지구의 지질 격변을 과묵한 그림으로 펼쳐 보이는 고산 등, 자연 풍광들이 그래도 오래 기억에 남고 여행 수지의 대변에 기입된다. 조금 일찍 일어나 돌아본 도시의 별다를 것 없는 아침 풍경도 있다. ‘여행의 기술’을 다룬 책들이 쏟아지고, 김영하, 유시민씨의 여행서가 지금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나란히 올라 있는 것도 그런 갈증 때문이리라.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이승수 옮김, 문학동네 펴냄)는 근자에 내가 읽은 최고의 여행서다. 이 책을 소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자면 한국어판으로 500쪽이 넘는 책의 문장들을 거의 다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독일 남부 도나우에싱겐(푸르트방겐의 어느 집 수도꼭지라는 설도 있다)부터 흑해에 면한 루마니아의 항구도시 술리나까지 2888킬로미터의 강길을 4년에 걸쳐 따라가며 이 책을 썼다. 책은 1986년에 출간되었는데, 본문 앞에 첨부된 지도에는 서독과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소비에트연방 등 지금은 사라진 국명이 보인다. 그러나 다뉴브를 따라 중부유럽에 얽혀 있는 길고 복잡한 민족의 이동과 섞임, 성쇠를 동반한 경계의 변천사에서 보면 이 또한 흔한 역사의 한 장일 뿐이다.

 

마그리스는 헝가리 시인 요제프 어틸러가 어머니의 쿠마에인 피와 트란실바니아 태생 아버지의 로마인 피를 그 자신의 핏줄 속에서 뒤섞었듯, 그의 시가 다뉴브의 물결을 승자와 패자의 뒤섞임, 민족들의 혼합과 충돌 안에서 표현했다고 전해준다. 동시에 저자는 다뉴브를 그 무심하고 유유한 시간의 흐름, 역사라는 우월적 지위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며, 그때그때 그 순간을 살았던 민족과 개인의 운명과 결단, 긴박한 호흡 안에서 보고 느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단 하나의 차원, 순수한 현재에 역사란 없다. 파시즘이나 시월혁명은, 그 사건이 일어나는 각각의 순간에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작은 시간의 파편 속에서는 단지 침을 삼키는 입, 손동작,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시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섬세한 참여가 이 특별한 여행서를 ‘역사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시적 인간’으로 우리를 재발견하게 해준다. 그러고 보면 이국의 여행지에서 황금빛 저녁놀은 유난히 빨리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났던 것 같다. 가슴을 할퀴면서.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8월 6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4750.html#csidx106aeccfe296788bb6723cc7f586e0b onebyone.gif?action_id=106aeccfe296788bb6723cc7f586e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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