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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경제개발에서 발전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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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11-11 11:50 조회19,3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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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마 민주항쟁과 10·26 사건 40주년을 지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 한국인에게 유전자처럼 박혀 있는 개발에 대한 관점이 그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박정희가 남긴 가장 심각한 역사적 유산인지도 모르겠다.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은 한국 국민 집단무의식의 출발점이고 원형이며 자동선택 옵션이 됐다. 분배정의에 대한 견해가 다를지라도, 정치적 지향이 다를지라도, 사회 현안에 대한 판단이 다를지라도, 개발과 성장만큼은 절대다수가 당연시하는 공통의 합의사항이다. 거의 신앙에 가깝다. 대규모 집회에 쏟아져 나온 인파를 보고 있으면 경제개발주의의 명암이 군중의 얼굴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개발지상주의의 주술에 씌어 살았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때문이었다 해도 그 방식이 대단히 강압적이고 예외적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수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정치 위기, 경제 위기, 교육 위기, 성평등 위기의 본질은 거의 대부분 경제개발과 성장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기술적인 해결책도 백약이 무효한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전문가의 처방이 아닌 평균인의 상식을, 묻지마식 개발이 아닌 숙고된 발전권을 찾아야 하게끔 되었다. 경제개발이 워낙 강고한 경로를 형성하면서 우리를 끌고 왔으므로 그것의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회복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없이는 한국 사회가 내파될 수도 있음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출산율 저하, 정치·경제 양극화, 사회통합의 해체는 그런 비극의 전조라 할 것이다.

 

과거 제3세계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개발주의는 제1세계의 케인스주의형 복지국가와 제2세계의 국가사회주의형 산업국가의 장점을 취하려 했던 국민경제 기획이었다. 한국과 일부 신흥공업국이 채택했던 발전국가는 제3세계 개발주의의 변형된 버전이었다. 그때의 개발주의는 성장과 근대화를 절대선으로 간주하고,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산업화 전략을 통해 미국과 서구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명제에 매달렸다.

 

하지만 개발이 문화 파괴와 환경 훼손과 지역공동체의 와해라고 하는 부작용을 낳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초에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이때 소개된 지속가능 발전은 기존의 개발 관념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했다. 그 이전 세대에서 진리처럼 여겨지던 전통 개발모델, 즉 문화와 환경의 파괴를 무릅쓰고라도 경제개발을 포기할 순 없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사상이었다.

 

지속가능 발전 개념을 제시했던 사람들이 경제개발과 경제성장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거부한 것은 경제가 인간의 삶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보는 경제 환원주의,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이 가치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실증주의적 관점, 전세계 모든 나라가 영미식 산업화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구중심주의였다. 이런 파괴적 삼각구도가 기존 개발 패러다임의 문화적 둔감성과 환경 파괴의 주요 원천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구도를 시정해 ‘좋은 발전’을 추구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지속가능 발전 개념은 인권에서 단비와 같은 지성적, 실천적 돌파구가 됐다. 이와 연관해서 김태균 교수는 개발학이라는 말 자체를 이제 ‘발전학’이라 불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무튼 이때부터 전세계 인권운동은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대안적 발전권 개념을 꾸준히 확장시켜 왔다.

 

첫째, 진정한 발전을 위해 의사결정에 있어 대중이 폭넓고 깊이 있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권리로서 부여해야 한다. 예컨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절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전권은 대중의 참여권리 및 민주주의 권리와 함께 가야 한다.

 

이런 식의 발전권을 주도적으로 확산시켜온 옥스팜은 빈곤 퇴치를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단체다. 여기서 이른바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나왔다. 옥스팜은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안전한 작업조건, 자연자원을 활용할 능력, 적정한 생태적 실천을 전제로 한 ‘생계를 누릴 권리’, 깨끗한 물, 공중위생시설, 교육 등 ‘기본적 공공 서비스를 누릴 권리’, ‘재해로부터 안전할 권리’, 공적인 논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경청의 대상이 될 권리’, 그리고 인종, 문화, 종교, 여성,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직업과 자원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한 존재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어야 빈곤이 근절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두 항목인 경청받을 권리와 평등한 대우 권리는 경제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속한다.

 

둘째, 여성과 문화와 환경을 하나로 통합한 패러다임이 발전권의 기본전제가 됐다. 빈곤 및 빈곤층의 사기 저하와 생활 침체를 시정하면서도 진보적 젠더관계를 옹호하고, 문화유산을 보호하며 환경을 보전하는 발전을 참된 발전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여성·문화·발전’(WCD) 패러다임이라 한다. 이 패러다임은 빈곤 퇴치라는 목표로부터 젠더 평등, 문화적 감수성, 환경 보전의 목표를 분리해서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좋은 개발과 성장’에 대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이런 논리를 연장하면 페미니즘이 기후위기 대응의 선봉에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셋째, 자유권, 사회권, 연대권의 구분을 넘어선 통합적 인권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개별 권리들도 결국은 다음과 같은 ‘인권 꾸러미’에 속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즉, 기본욕구를 충족하고 공중보건과 양호한 의료를 통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권리 꾸러미, 권력과 고정관념의 부당한 간섭 없이 자신의 재능과 생각과 정체성을 키우고 꽃피울 수 있게 해주는 권리 꾸러미, 전쟁, 내전, 범죄 그리고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외국인 혐오와 관련된 구조적 폭력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는 권리 꾸러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발전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존의 경제개발과 성장 논리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제공한다.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의 극단적 선택, 탈북민의 아사,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보라. 이런 사람들에게 굴욕감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발언권과, 여성주의 시각으로 문화와 환경을 지킬 권리와, 필요한 다면적 욕구를 패키지로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었어야 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자본이동과 자유무역과 소비지상주의가 곧 발전을 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잘 안다. 이제 21세기형 발전권을 다시 불러올 시간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국인권학회장

 

한겨레신문 2019년 10월29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5045.html#csidx31086c313d85f50bcc29a794da8d30a onebyone.gif?action_id=31086c313d85f50bcc29a794da8d3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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