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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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11-28 14:13 조회17,8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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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취기를 빌려 옆자리 선배에게 실없이 물어본 적이 있다. “형, 문학이 뭡니까?”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전체에 대한 느낌, 생각이지.” 명쾌하다 싶었다. 문학 출판 일을 하고, 어쭙잖은 글을 쓰며 그 언저리에서 생활해온 지 꽤 되지만 문학의 어떠함에 관해서라면 정리되고 분명해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서 그때그때의 개별 작품에서 배움과 답을 구하는 일이 가능한 최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 자주 여투게 된다.
문학이 전체에 맞서고 있다는, 한때는 정언명령처럼 나를 지배했던 명제도 평소에는 거의 망각 상태로 있다가 숙제하듯 읽는 시 한 편에서 슬그머니 일깨워지기도 한다. 가령 폴란드 시인 심보르스카의 다섯 행짜리 짧은 시 ‘베르메르’.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충분하다>,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그리고 그럴 때, 베르메르의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1658)에 대한 한없는 경의와 찬사를 품고 있는 이 시의 ‘전체’가 ‘단지에서 그릇으로’와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의 작은 세부, 일상의 무심한 구체성과 한몸이라는 게 꽉 차게 다가온다. 동시에 창으로 흘러들어 여인의 노동을 비춰주는 그림의 환한 빛은 그 묘사를 생략한 시인의 결단을 통해 대지의 시간과 다른 지평의 결속에 대한 상상을 시의 또 다른 공간으로 만든다.
그러고 보면 삶의 세부, 구체성을 부조하고 기억하려는 언어의 집념에 대한 다하지 않는 놀라움이야말로 나를 오래 문학의 동네에 머물게 해주고 있는 요인이 아닌가도 싶다.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이재영 옮김, 창비)의 두 번째 편 ‘파울 베라이터’에서 화자 ‘나’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독일 남부의 소도시로 향한다. 필기며 행동이 굼뜬 짝 프리츠의 숙제를 대신 해주는 ‘나’를 야단치지 않고 격려해주었던 파울 선생님. 소설에는 두 아이가 파울 선생님의 수업 중에 함께 공책에 그린 교실의 그림이 실려 있다. 선이 좀 삐뚤긴 해도 1 대 100의 척도에 맞춰 꽤 정확히 그려보려 한 것 같다. 그리고 거의 한 페이지에 걸쳐 먼 기억 속 파울 선생님의 교실이 묘사된다. “교실 안에는 기름을 먹인 나무바닥에 나사로 고정해놓은 스물여섯 개의 책상들이 세 줄로 늘어서 있었다. (…)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던 자리는 깊숙한 벽감 속에 있던 남쪽 창문 옆이다.” 인용하려고 책을 펼치니, ‘이런 디테일한 묘사란 무엇인가?’ 하고 적어놓은 메모가 보인다. 그 밑에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자답해놓기도 했다. 아마도 그러기 쉬울 것이다.
문학의 전체는 매일의 우유 따르는 노동, 어떤 선생이 늘 서 있던 벽감의 세부 없이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제발트는 렘브란트의 그림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에서 동료 의사들의 시선이(정확히는 한 사람을 빼고는) 해부되고 있는 몸이 아니라 그 너머에 펼쳐진 해부학 도해서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 도해서에는 끔찍한 육체성이 하나의 도표, 하나의 인간의 도식으로 환원되어 있다.”(<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 그 끔찍한 육체성의 주인은 바로 몇 시간 전에 절도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아리스 킨트라는 인물이었다. 도해서가 체계와 법칙으로 도달하려 한 보편적 전체가 문명의 빛이고 대로라고 해도, 어떤 이는 어떻게 해도 그 보편에 환원되지 않는 개별의 어둠과 미로에 남으려 한다. 전체에 대한 문학의 지향이 때로는 턱없이 무모하게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서정인의 명편 <달궁>(전 3권, 1990)을 읽다가 ‘저자 후기’ 한 대목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을 오염시키지 말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을 가진 그 사람인 채 사람으로 대접하라. (…) 그 사람의 과거를 없애면 그를 죽이는 거다.” 행갈이며 대화의 따옴표 하나 없이 하염없이 이어지는 이 장편소설을 두고 한때 우리는 ‘문학의 실험’을 말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설의 한 사람을 기억의 전체로서 그 사람인 채로 대접하려면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소멸되는 것, 잊히는 것, 파괴의 잔해를 동반한다. 그 잔해를 불러 모으고 일으켜 세우며 사라진 시간의 기억을 복구하는 일이 누군가에 의해서 진행되는 동안은,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11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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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8593.html#csidxc5313955f257be38b64d3d8b74b8e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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