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수] 문학이라는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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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6-14 10:41 조회26,0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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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내가 처음 출판사에 취직하던 무렵만 해도 활판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금방 전산 조판과 필름 인쇄가 대세가 되었고 컴퓨터와 인터넷 세상으로 넘어가는 데 채 10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은 아예 필름을 만들지 않고 파일 상태로 인쇄소에 전송한다.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을 익히면 기술적으로는 누구나 쉽게 책을 만들 수 있는 시대이다. 좀더 넓게 책이라는 매체를 둘러싼 제반 환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변화의 폭이 어떠한지는 주지하는 대로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역동적인 정치·사회적 변화까지 가세하면서 한국 문학의 ‘장’(場)은 지금 지각 변동을 겪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과정은 문학에 대한 재정의를 둘러싼 세대 간, 젠더 간 이해와 이데올로기의 충돌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문학 출판 일에 입문하던 그 무렵 ‘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의 맥락은 주로 대중매체의 위세, 영상문화의 부상 앞에서 예견되는 문학 영역의 위축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잇따랐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성급한 진단이었던 것 같고, 이즈음의 판단으로는 정보기술(IT) 문명이 자신을 낳은 문자 매체의 초라한 연명에 그리 가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어보게도 된다.
그러나 ‘축음기, 영화, 타자기’와 같은 새로운 기술 매체가 기록과 정보 전달에서 독점적 권위를 누려온 문학의 자리(문자라는 ‘매체’의 총화로서)를 대신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에 이미 ‘문학의 죽음’이 선언되었다고 보는 키틀러라면(그는 1880~1920년 사이 최초의 기술 매체들에 대해 작가들이 ‘경악하며’ 썼던 텍스트를 논거로 활용한다), 20세기 후반 컴퓨터를 통해 새로운 매체연합이 완성되고 그것이 인간 삶의 핵심 조건이 된 상황에서 문학은 일찌감치 시효를 다한 낡은 ‘매체’라고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인간 중심의 환상’, 그러니까 ‘총체적인 인간’은 곧 ‘문학’이라는 환상이었고, 그것은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문학과지성사)
키틀러에 따르면 축음기가 소리나 소음을 있는 그대로 재생했을 때, 의미화라는 인간의 필터가 그 실재의 세계에 가해왔던 상징적 폭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소리에 대한 문자적 기표라 할 수 있는 악보는 인간이 얼마나 선별적으로 세상의 소리를 기록해왔는지 보여준다. 시의 운율은 망각을 이기기 위해 문학이 발명해낸 기억술의 하나이지만, 축음기는 기억을 기술화한다. 문학의 상상력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그 실현 공간을 찾아왔지만, 영화는 그것을 스크린 위에 가시적으로 제시한다. 인간 내면의 영상은 스크린 위에서 실현된다. 영화가 상상계의 완성이라는 것은 스크린을 활보하는 인간이 ‘나’의 도플갱어들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문자의 기록 방식 또한 타자기의 발명으로 큰 전환을 맞는다. 여성 타자수의 등장으로 글쓰기의 남성 독점이 깨어지고 개개인의 인장이 제거된 규격화된 기록이 가능해진다. 타자기는 문자 정보의 처리 기술 전반을 상징하는 장치가 된다. 키틀러는 타자기의 문법이 디지털이라는 혁명적 기술로 진화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보고, 쓰게 되었던 것이다. 키틀러의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키틀러의 입론에 대해서는 ‘매체 결정론’이나 ‘반인간주의’ 등 그간 많은 비판이 있어온 모양이다. 그러나 문학을 매체의 역사 안에 놓는 그의 발상은 곳곳에서 신선한 자극을 준다. 키틀러가 보기에 문학은 자신의 매체적 속성을 망각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특권화했다. 그런데 기술 매체의 등장으로 문학이 그 오랜 특권과 한계를 드러낸 순간 문학은 ‘예술’에서 ‘낡은 매체’로 강등되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전체적으로 반드시 부정적인 방향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키틀러는 괴테의 발언을 구전 전통에 대비되는 문자 독점의 문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한 예로 인용하고 있지만, ‘매체의 시대’에 문학이 스스로의 현실적 좌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데도 충분히 시사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이란 파편들의 파편이다. 일어나고 말해진 것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이 쓰여지고, 쓰여진 것 중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만이 남게 된다.” 문학의 자기의식은 의외로 유연하며, 역사를 잊은 적이 없다. 문학이 결국 ‘역사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맥락에서도 그러하리라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6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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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7472.html#csidxf7cbec4490579c79b3d89197391d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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