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석] 비성년의 눈으로 '리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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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7-11 13:06 조회24,0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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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휘라는 이름을 풍문으로만 듣던 사람들에게는 물론 그의 소설을 꾸준히 따라 읽던 독자들에게도 이 작품은 기대와 딴판이었을 것이다. 노동 현실의 재현(『폐허를 보다』, 2016)이나 자전적 후일담(『건너간다』, 2017)의 흔적은 먼 배경으로 물러나고 만물에 영혼이 내재한다는 애니이미즘(animism)적 마법과 생명에 대한 외경이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 『우리의 여름을 기억해줘』는 그 문명 비판적 주제에 있어서나 팽팽한 구성과 속도감 있는 문체에 있어 작가의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자질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설화적이면서도 무속적인 환상들의 도입은 잘 만들어진 생태주의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작가의 직전 작품이 소설로 쓴 현대차 노조 운동사라 할 『노동자의 이름으로』(2018)였으니 이 느닷없는 각도 변화는 어디서 왜 온 것일까.
역시 십대 주인공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성화고에서 영상을 공부하는 산하와 상처를 안고 시골에 은둔해 그림을 그리는 정서는 ‘청소년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문제아적 인물들을 닮아있지만 이들 존재의 위치는 조금 다르다. 통념상의 성년과 소년기의 경계에 선 열여덟, 열일곱 나이는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사고와 행위가 사춘기적 방황이나 반항과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의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하며 그런 한에서 작품 속 기성세대보다 능란하고 성숙한 면모마저 갖추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라면 성년에 미달하는 미성년이 아니라 통상의 성년과는 다른 비(非)성년의 경로를 개척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소설을 두고 청소년소설이냐 아니냐를 가리기보단 어른과 아이, 사실과 환상, 문명과 자연의 흐릿하고 낡은 경계 어딘가로 툭 떨어진 듯한 이 소설이 비성년의 눈을 빌려 무엇을 하려 하느냐가 초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의도적 망각’ 그러니까 새판 짜기를 위한 ‘리셋’이다. 이 소설의 플롯은 여러 갈래지만 아버지의 투신자살을 목격한 뒤 기억상실에 걸린 정서가 산하와의 만남을 계기로 기억을 되찾게 될지 여부가 중심이다. 그러나 정서는 끝내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 이 결말은 묘하다. 그것은 단순한 기대의 좌절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한 선택, 의지적 결단처럼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정서가 숲이 사라진 청기산 위로 새 한 마리가 추락하는 장면을 그리는 데서 소설은 멈춘다. 개인사적 기억을 지운 자리에 집단사적 상징이 들어선 셈이다. 노인들만 남은 농촌 청기마을의 보험 살인 사건이나 태양광발전 설치를 둘러싼 주민들의 반목, 정서 아버지의 죽음과 산하 어머니의 각박하고 신산한 삶이 모두 자본주의 문명의 “돈 귀신”이 지닌 마성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어떤 세상을 리셋할 것인지는 애초부터 자명했다. 그 자명성이 오히려 걸리기도 했지만 창궐하는 “돈귀신”들을 형상화한 작품의 마지막 5장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 작품이 지닌 의미심장함에 대해 한 가지만 덧붙여두기로 한다. 여고생 산하가 캠코더를 들고 처음 누빈 곳이 촛불광장이었다는 사실이 소설 초반에 등장하고 그의 죽은 아버지가 교육운동가였다는 정보는 중간에 스쳐 지나가듯 나온다. 깨어있는 비성년의 눈으로 낡은 질서를 ‘리셋’하려는 이 소설은 왕년의 진보 운동 세대가 촛불을 든 밀레니얼 세대에게 그 권한과 책임을 이양하는 상상적 의식에 근사(近似)한지도 모르겠다.
강경석.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2019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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