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문체부의 연이은 비리와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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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8-16 12:47 조회21,5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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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한국문화원장 박모씨의 비리 혐의에 관한 조사가 부실했다는 지난 2일 ‘뉴스타파’의 보도를 접하고 그냥 넘어가기는 어렵다.
7월16일 뉴스타파는 박씨의 비리를 처음 보도하며 외교부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이 지난 5월의 정부합동감사에서 봐주기 감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보도 직후에 해외문화홍보원은 조사에 나섰고, 7월22일부터 25일까지 직원 4명으로 이루어진 조사팀이 현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박 원장의 비리를 알린 (아마도 계약직일) 문화원 직원들이 궁지에 빠진 모양이다. 비리 혐의에는 현 박양우 문체부 장관의 윤모 정책보좌관도 연루되었다니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뉴스타파의 보도 영상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블랙리스트 스캔들과 관련하여 문체부 공무원 등 수사의뢰가 된 10명 중 하나인 김모씨가 기자에게 철저한 조사를 다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난 7월1일자로 문체부는 대규모 인사발령을 냈다. 작년 말 문체부가 제2차 대국민사과와 함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규명 이행계획을 발표하면서 수사의뢰한 공무원 중 3명이 이날 산하기관으로 발령이 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3명의 인사 내용을 본인들이 원하지 않아 문체부가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김씨이며 그는 해외문화홍보원의 해외문화홍보기획관이 되었다.
2017년 7월부터 1년 가까이 활동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펴낸 백서에 따르면, 김 해외문화홍보기획관은 문체부 출판인쇄산업과장 시절에 하급자에게 ‘2016년 찾아가는 중국도서전’ 위탁도서 중 5종의 배제를 지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인물이다. 그는 이미 출판계에 의해 형사고발이 되어 있었지만, 해외 문화원에 근무 중이라는 이유로 직접 조사도 받지 않았다.
이처럼 제대로 조사나 처벌을 받지 않고 해외문화홍보기획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산하기관의 비리 혐의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 실행, 짬짜미 비리, 자기 식구 봐주기 관행이 공무원 사회의 체질과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다는 의혹이 짙다. 다른 예로, 지난 7월19일 박종관 문화예술위원장은 문화예술위원회가 저지른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거듭 사과하는 자리를 마련했지만, 상부 지시를 거부해 불이익을 당한 문화예술위 직원들과 달리 정작 핵심적 역할을 한 ‘가해자’들은 피해 예술가들 앞에 나타나지 않아 거센 항의를 받았다.
지금 양심적이고 능력있는 공무원들의 심정은 매우 참담할 것이다. 나라 안팎의 정세가 긴박한 대전환의 시대에 공무원 사회의 갱신은 절실하다. 블랙리스트를 기획하고 실행한 이들의 진심 어린 반성과 변화가 없다면, 진상규명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 것이고 국정목표의 하나인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문화국가’를 위한 참다운 ‘민관협치’의 길을 개척할 수 없다.
뉴스타파의 영상은 민망할 뿐이다. 문체부 공무원 출신 문화원장은 자신의 결백을 위한 맞대응 차원인지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려고 취재기자에게 걸핏하면 휴대폰을 들이댄다. 관련된 젊은 주무관은 공익제보자에게 신분 노출 염려가 있으니 조사를 받지 않으려면 연락을 달라는 묘한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 기자가 e메일 사본을 들이대며 왜 공익제보자의 신상보호 원칙을 무시하는 메일을 보냈느냐고 추궁하자 눈이 부시다면서 딴청을 피운다. 공익제보자가 그렇게나 만만했던가, 명확한 증거가 남는 e메일을 사용하다니.
나도 블랙리스트가 신물이 나지만, 그렇다고 물러서기는 어렵다. 지난 1월7일 대한출판문화협회 윤철호 회장은 문체부의 어설픈 블랙리스트 책임규명 이행계획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며 공무원 두 명의 실명을 거론했다. 그중 한 사람이 윤 회장을 명예훼손으로 형사고발하고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내가 2월15일자 ‘정동칼럼’을 빌려 이런 적반하장의 행태를 실명으로 비판하자 그는 나마저 형사고발했다. 당연히 무혐의 처리되었지만, 경찰 출두 일정을 잡는 일이나 조사과정은 내게 괴로운 시간낭비였다. 학교 선생이 글이라도 한 줄 더 읽을 시간에 무슨 꼴인가. 그래서 이 글이 비판하는 모든 공직자의 실명을 숨겼다. 독자께서 겁먹었구나 하신다면 항변하기 어렵지만, 물러서지는 않아야겠다. 고초를 겪는 힘없는 공익제보자들을 잊어서야 쓰겠는가.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경향신문 2019년 8월 8일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82043005&code=990308#csidxcbf5679be7e05c0a5f91008004cb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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