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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이따금씩’이 만드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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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07-05 17:19 조회1,0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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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란 말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 알려졌는데 그것은 비단 기독교의 영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간다는 말은 현세의 제도나 법으로는 다룰 수 없는 나쁜 행동과 마음가짐을 향한 민중의 바람 내지 자기 단속이었을지 모른다. 다르게는, 고달픈 현생의 삶에 대한 보상 욕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착한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간다는 말을 나는 제법 듣고 자랐는데,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죽어서라도 이승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 지옥의 의미가 점점 달라졌다. 예전에도 현실의 삶이 너무 힘들면 왕왕 ‘사는 게 지옥’이라고 했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지금 사는 이곳 전체를 지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유행했던 ‘헬조선’도 지금 여기가 지옥이란 뜻 아닌가. 심지어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는 어느 웹툰의 제목으로 무너져버린 내면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힘이 되는 게 아니라 서로 상처와 함정이 되는 현실에 대한 음울한 진단이라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이제 정치, 사회적 현실에서 창궐한 지옥 귀신이 이웃이나 친구 사이마저 헝클어놓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얼마 전 출간된 더글러스 러미스의 저작 <래디컬 데모크라시>(한티재)의 ‘제5장 민주주의의 덕목들’은 흥미롭게도 신앙 문제를 다룬다. 저자는 먼저 ‘신뢰와 약속’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것은 상식이라는 너무도 흔한 주제를 다루기 위함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꿈꾸는 신뢰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잔인한 괴리”를 잘 알고 있다. 세속적인 신뢰와 약속을 다루다가 종교적인 신앙을 거치는 지적/정신적 도약은, 아마도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진즉 퇴출된 신뢰와 약속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인 듯 보인다. 저자의 이런 도약에 빛이 번쩍, 하는 부분은 신에 대한 신앙을 자식이나 이웃 등에 대한 믿음으로 역전시키는 지점이며 이것을 그는 ‘민주주의 신앙’이라 부른다. 그전에 더글러스 러미스는 종교(기독교)적 신앙에 내재된 일종의 ‘미래주의’ 그리고 그것의 세속 버전인 ‘진보주의’를 예리하게 도려내어린다.


추상적인 존재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을 신앙의 본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사유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명확히 밝힌 저자는, 아브라함이 자신이 이삭의 아버지임을 참되게 믿었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거절했어도 하느님에게 벌 받지 않았을 거라 믿었으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어머니라면 분명히 가졌을 이 믿음이 없었다. 아브라함이 만일 신과 서약을 맺었다면 동시에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서약도 맺었을 텐데, 그것을 몰라서 아브라함은 신의 진정한 시험에서 탈락했고 이후 역사는―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피로 점철된 ‘아브라함의 신앙의 저주’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더글러스 러미스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과의 약속에는 사람들과의 약속도 포함되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아니 서구 문명은 그것을 몰랐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하지만 더글러스 러미스가 ‘민주주의 신앙’에 대해 감상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약함과 어리석음과 두려움에 대한 분명한 이해의 토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이런 약점들 때문에 “신앙처럼 무거운 무언가가 요청”된다. 민주주의는 약점투성인 인간이 “이따금씩” 보여주는 “민주적 신뢰의 세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민주주의 신앙은 사람들에게서 이따금씩 볼 수 있는 모습을 근거로 사람들의 가능한 모습을 믿으려는 결심이다.” 인간이 “민주적 신뢰의 관계”를 이따금씩 보여준다고 해서 그 관계를 향한 내재적 욕망마저 이따금씩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따금씩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 욕망은 상당히 뿌리 깊고 지속적일 것이다.


그런데 ‘민중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와 타인이 지옥이거나 감옥이 된 현상은 겹치지 않는가? 뒤집어 생각하면 인간이 인간에게 특별한 무엇을 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약함과 어리석음과 두려움”의 증표일지 모른다. 물론 역사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분열시킨 주범은 근대자본주의가 가져온 상품 사회다. 더구나 지금은 인간의 정신과 언어와 마음마저 인공지능 등으로 인해 상품이 되고 있지 않은가. 타인(자기 자신)의 ‘이따금씩’을 믿는 일이 민주주의를 위한 시작이고 나아가 상품 대신 ‘민주주의 신앙’이 상식이 돼야만 근원적 민주주의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처한 일대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지금 개벽’이 긴급한 이유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4년 6월 23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6232006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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