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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대중과 인권 이야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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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4-02 14:00 조회31,2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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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이 과거에 비해 인권을 더욱 지지하는 사회가 되었는가. 겉으로는 당연히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인권에 대한 발화가 늘어났고 권리주장도 흔해졌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들여다보면 복잡하고 모순적인 면이 나타난다.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변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인권을 규정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독재에 반대하는 가치와 지향으로서 인권을 상정하곤 했다. 인권은 신성한 개념이었고 불의한 권력을 거부하는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인권은 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구체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내가 불이익을 당했을 때 불러내는 문제 해결사의 역할도 한다.

 

또 다른 변화는 인권의 당파적 양극화 현상이다. 인권을 말하면 십중팔구 특정한 진영에 속해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 저의를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권을 내세운다는 의구심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 포부라는 기본 원칙이 한국에 오면 이른바 ‘좌파’의 전유물로 치부되거나, 그런 식의 편 가름 속에 자리매김되어버린다.

 

예전에 비해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심각한 문제다. 오해를 받아 개인적으로 억울해서가 아니다. 인권의 당파적 낙인효과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왜곡으로 이어지고 그 후유증은 모두에게 미친다. 앞으로 선거철만 되면 인권 중에서도 아주 첨예한 몇몇 이슈를 중심으로 후보와 정당을 싸잡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당락이 바뀌는 일이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위험은 민주주의 원리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아무리 다수결이라 해도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 있지만, 그 원칙이 흔들리는 건 아주 쉽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정치인이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리하다는 정치공학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반인권 세력은 똘똘 뭉쳐 그런 약한 구석을 파고들면서 혐오를 조장하고 인권을 흔들어댄다.

 

전통적으로 인권운동은, 인권을 보호할 법과 제도를 잘 마련하면 인권이 지켜질 수 있다는 제도주의적 인과모델에 크게 의존해왔다. 이런 모델이 일정한 효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제가 통하려면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평형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런 토대적 조건이 붕괴하면, 예컨대 극심한 불평등,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폭발 일보 직전의 울분, 제도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팽배한 상황에서는 법과 제도만으로 인권을 지키기가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 인권의 딜레마가 있다. 지금까지 인권운동의 주된 방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규범에 비추어 현실을 비판하고 그 규범에 맞추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인권은 세간의 평가와 무관하게, 옳은 원칙에 따라 밀고 나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느새 대중의 ‘가슴과 마음’을 사로잡아야 인권을 유의미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시대가 와버렸다. 인권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인 대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제 인권운동은 정치인들만큼 여론에 일희일비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을 고민해야만 하게 되었다. 전세계 인권운동에서도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에 일반 시민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인권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핫한 이슈가 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아이디어 몇가지를 소개한다.

 

우선 인권 이야기의 틀을 잘 짜야 한다. 가치에 근거한 서사를 만들려면 말을 거는 방식을 잘 궁리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 건설적인 해결책을 함께 제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 분야에 예산 1억원만 쓰면 1천명의 시민에게 다음과 같은 도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인권 이야기의 톤을 조절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개탄과 비판과 계도로만 인권을 이야기하면 자칫 거부감이나, ‘가르치려 든다’는 반발심을 부를 수 있다.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우리 모두 이런 점을 성찰하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낮은 소리로 말을 거는 편이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다고 한다.

 

어떤 집단을 명확한 개념어로 규정하면 가시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사회적 거리를 더 멀게 할 우려도 있다. ‘노숙인’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거처할 곳이 마땅찮은 분들’이라고 표현하거나, ‘빈곤층’을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이라고 묘사하는 편이 낫다.

 

과감한 역할 분담, 그리고 칸막이를 헐어 외연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난민 이슈에 대해 난민운동가가 아닌 유명 연예인이 발언하는 것이 대중에게는 색다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 대신 난민인권단체는 평소에 여타 시민운동과 협력관계를 맺어놓는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 어린이 관련 단체의 활동이나 캠페인에 힘을 보태놓으면 난민 아동을 지원할 필요가 생겼을 때 그 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품앗이 활동을 통해 인권단체가 마당발이 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시민사회 전체에서도 인권운동이 융복합적으로 커질 수 있다.

 

인권운동은 당연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활동을 벌인다. 그런데 대중은 인권운동이 이런 활동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곡해하곤 한다. 인권운동이 특정 이슈에 몰두하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고통과 애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소통장애가 쌓이면 인권운동과 일반 대중이 자칫 멀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이 일상적으로 겪는 사회모순에 대해 인권운동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어떨까. 예를 들어, 서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주택 문제, 수많은 젊은이들을 나이 19살에 이미 ‘루저’처럼 기죽게 만드는 줄세우기식 대학입시 문제에 인권운동이 파격적으로 대처하는 걸 고려해볼 수도 있겠다. 부동산 투기와 학력·학벌 차별을 반인도적 범죄나 마찬가지인 중대 인권유린이라고 선언하고 개입한다면 대중이 인권운동을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신경과학의 통찰을 인권에서 활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고문에 대한 태도 차이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진보 성향의 사람은 고문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보수 성향의 사람은 고문의 신체적 측면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전자에게는 개인의 사연에 초점을 맞춘 메시지가, 후자에게는 고문이 초래하는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을 부각하는 메시지가 효과적일 것이다.

 

인권운동이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수용할 것인지, 수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인권운동이 인식하는 인권과, 대중이 인식하는 인권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건 민주주의의 역설이자 현실이다. 인권운동 앞에 놓인 큰 도전이다.


 

조효제. 성공회대교수

 

한겨레신문. 2019년 3월 26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87467.html#csidxdd2ec65cff1f3bc85f0933485f5b30d onebyone.gif?action_id=dd2ec65cff1f3bc85f0933485f5b3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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