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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석] 내겐 아름다운 것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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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3-12 17:36 조회31,1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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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의 첫 소설집을 읽고 솔직히 놀랐다. 가난한 청년세대의 고달픈 현실을 핍진하게 묘사하는 재능 있는 작가지만 평범한 소재와 때로 쓰다만 듯한 결말로 이 작가만의 개성이 충분히 드러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선입관은 통독 이후 남김없이 깨졌다.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을 내리읽고 나자 매 편이 서로에 대한 지지대 역할을 해주고 있어 미완의 느낌은 균형 잡힌 절제로 소재의 평범함은 끝내 구체적 현실에 발 딛고 있겠다는 단단한 의지의 소산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며 주제의식의 일관성이 힘 있게 다가왔다.
 

처음엔 직장 초년생의 윤리적 갈등을 다룬 표제작 ‘가만한 나날’과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선배 세대와의 위화감을 솔직하고 재치 있게 탐구한 첫 번째 수록작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에 주목했지만 미완성인 것처럼만 여겨졌던 ‘얕은 잠’ ‘감정 연습’ ‘말과 키스’ 같은 작품들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동거 중인 젊은 커플의 파도타기 연습을 밑변에 깔고 있는 ‘얕은 잠’은 소설집 전체를 관류하는 매력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많은 남자들이 등장한다. 우선은 동거인인 정운이 있고 두 사람의 서핑강사, 주인공의 유년시절 회상 속 아버지, 파도에 휩쓸려 도착한 낯선 해변에서 마주친 노인과 외국인노동자들 그리고 길 잃은 미려를 서핑강습장으로 돌려 보내준 픽업트럭 사내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미려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불필요하게 엄격하거나 위협적이어서 미려가 자유롭게 행동하거나 뭔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데 장애가 되곤 하는데 이때의 남녀관계는 마치 어른과 아이처럼 위계화된 형상을 띤다.
 
미려를 ‘젊은 여성=어린아이(미숙함)’라는 등식의 족쇄에 묶어두려는 ‘남성=어른(성숙함)’의 세계는 미려가 스스로를 미숙한 어린아이처럼 여기게 만드는 압도적 힘으로 형상화되지만 성장을 향한 눈뜸은 아주 조그만 체험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온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파도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는 서핑보드에서 홀로 일어서는, 우연하고도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커다란 상징으로 만들어내는 재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주인공의 이름 미려는 아마도 아름답다는 뜻의 ‘美麗’일 것이다. 따라서 ‘얕은 잠’은 두려움을 벗고 일어서는 일이 곧 아름다움이며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 ‘나’를 회복하는 일과 그것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내겐 아름다운 것이 필요해”라는 ‘현기증’의 일견 무심하기조차 한 대사가 무슨 취향 고백이 아니라 예사롭지 않은 성장선언처럼 들리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집에 묘사된 기성질서는 대개 선배나 어른 그리고 남자들의 “넌 잘 모르지만, 세상이 그래”(‘현기증’)라거나 “왜냐면, 사람이 그렇거든”(‘드림팀’)이라는 등의 대사를 통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젊은 여성 주인공인 ‘나’들은 거기에 의문을 품고 ‘조용히’ 싸운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 적극적 행위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어떤 싸움 못지않게 치열하다.  
 
“나는 세상 속에 있고, 세상과 접촉한다. 나의 눈, 나의 몸으로. 그렇지만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들, 나와 세상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것들. 그것들은 또 한 겹의 피부처럼 나와 세상 사이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중략) 내 안에서 목소리들이 자루에 갇힌 유령들처럼 와글거리며 서로 자기주장을 하고 힘을 겨루었다. 마치 내가 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말과 키스’) ‘가만한 나날’을 역설로 만드는 이 싸움을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거기에 우리가 새롭게 열어 가야 할 미래가 전부 걸려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강경석.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2019년 3월2일

원문보기 https://news.joins.com/article/23399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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