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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밀레니엄 대학생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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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10-31 09:31 조회35,7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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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가는 입시철로 분주하다. 내년 2019학년에 입학하는 새내기들 대다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시는가. 서기 2000년이다. 대학의 21세기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우리 삶의 양상이 달력에 따라 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연대기적 시대구분이 인간의 의식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새천년의 학생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모든 교육자가 고민하는 질문이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다수 21세기 청소년들은 능력이나 자질 면에서 그 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얼마 전 세계은행의 발표를 보니 그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5살까지의 아동 생존율, 학업 예상 기간과 학업 성취도로 계산한 학교 교육, 그리고 60살까지의 성인 생존율과 5살 이하 아동의 발달 정도를 점수로 계산한 어린이·청소년의 인적자본지수에서 한국이 0.84로 전세계 157개국 중 2위를 차지하였다.


물론 이런 식의 지표에는 허점이 적지 않다. 삶의 질이나 개인의 주관적 경험, 사회적 환경과 문제를 도외시하는 외형적 평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량적 역량지수가 높다는 말은 정성적 내용을 채울 수 있는 토대가 탄탄하고, 사회자본을 추가로 투입할 필요가 적다는 뜻이니 일단 양호한 객관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전제로 해서 밀레니엄 또래집단의 인권 관련된 교육에서 유념해야 할 바를 짚어보자.


우선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또 하나는 이들이 세월호와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권위에 대한 냉소,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였다.


두 흐름은 인권에서 모순적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한 태도가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켰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형식적 공정에 대한 집착을 실질적 공정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개별 원자적인 반차별 감수성을 인도적 성격의 반차별 의식으로 이끌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지고 있다.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전지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체념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에 대해 숙명론적인 인식이 많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국제비교 연구에선 각국 응답자 중 평균 14% 정도가 기후변화에 대해 체념적 태도를 보이는데, 연령대를 20대로 좁혀 보면 그 비율이 22%로 급증한다고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적 불평등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젊은 학생들에게 그것의 ‘불공정성’을 인식시키고 그것에 대해 ‘불의감’을 느끼도록 안내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거대한 문제에 압도당하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추상적인 것 같은 문제에 대해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청소년들의 감성에 부합하는 어떤 출구를 인도해주는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50년 뒤, 100년 뒤의 예상수치와 과학적 모델링으로 기후변화를 설명하기보다 올여름 폭염으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고 고생했는지를 스토리로 제시하는 교육이 훨씬 낫다.


아무리 엄청난 난제라 해도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격퇴시킬 수 있다는 ‘신나는’ 저항의 서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영향이 큰 게임산업에서 기후변화에 대적하는 지구인들의 ‘영웅적’ 투쟁과 같은 소재를 작품으로 개발하여 출시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세대 간 민주주의의 화두 역시 인권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인구구조가 급격히 변하고, 앞선 세대가 채택한 정책이 후속 세대에 예기치 못한 영향을 끼치는 오늘날, 세대 간 이해관계가 제로섬의 권리 충돌 문제로 비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세대 간 대화의 핵심은 적극적인 경청에 있다. 이란 출신의 급우가 난민 자격을 얻도록 힘을 모았던 중학생들이 발표한 입장문을 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지원해주었던 조희연 교육감과 염수정 추기경에 대한 감사의 인사가 나온다. 세대 간 경청의 모범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권 감수성이 선순환의 촉매제가 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2016년 한국일보가 한국, 브라질, 덴마크,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도 자기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하는 조사를 했다. 부정적 응답률 중 한국인이 40%로 제일 높았다. 특히 20대에서 54%가 한국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 젊은이들 절반 이상이 잠재적 이주자라는 뜻이다.


다시 태어나도 내 나라를 택하겠다는 사람이 자기 나라 인권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나라를 선택할 거야.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왜 이런 인권 이슈가 터져 나오는 거지. 이건 정말 우리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문제야. 빨리 시정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겠어.” 이것은 미래지향적이고 낙관적인 인권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인권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절박한 인권이 된다. 어차피 싫은 나라지만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 하니 인권을 호명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이 나라를 택하지 않을 거야. 뭐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어쨌든 내 한목숨 지켜야 하니 악착같이 권리를 찾을 수밖에 없어.” 이것은 수세적이고 비명에 가까운 인권이다.


후자의 인권담론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자존감이 낮고, 자신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기 쉬우며, 대안을 상상하기도 어렵고 타인과 자신에 대해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어린이들이 자해 인증샷을 올리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 이런 곳에서 호명되는 인권은 절망과 불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똑같은 문제제기라 해도 그것이 나타나는 맥락에 따라 이처럼 전혀 다른 양태로 인권담론이 통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불러내는 인권이 긍정적 선순환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희망의 인권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프랜시스 허치슨에 따르면 희망에도 종류가 있다. 수동적 희망은 순진하고 낙천적이다. 화물신앙처럼 인과관계를 혼동하면서 단순히 기술적 해법을 내놓거나, 미래의 변화에 대해 판에 박힌 환원론적인 인식에 의존하기도 한다. 매뉴얼 같은 식으로 인권침해에 대응하면 언젠가는 인권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것이 수동적 희망에 근거한 인권담론이다.


능동적 희망은 친사회적 인간관계 기술, 적절한 자신감,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과 전지구적인 것을 통합할 줄 아는 최적 조건의 문해 능력에 기반을 둔다. 능동적 희망으로서의 인권은 인권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고, 인권과 평화와 지속가능발전의 황금비를 모색하는 담론인 것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한겨레신문, 2018년 10월 31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8043.html#csidx95087a2c26638c3994c17b92353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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