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2019년, 평화를 위한 촛불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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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1-25 13:14 조회34,9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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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연천과 철원의 민통선 안쪽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연천에서는 두루미 보호에 온힘을 쏟고 있는 이석우 선생의 친절한 안내로 임진강 빙애여울에서 평생 처음 두루미를 관찰했다. 마침 두루미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허공에서 한바탕 군무를 펼치는 모습을 보는 복도 누렸다.
하류의 군남댐이 겨울에 불필요하게 물을 가둬 강을 얼리는 바람에 두루미의 생활에 적합한 얕고 물이 얼지 않는 여울이 위협받는 상황을 이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일행과의 점심도 채 다 못 들고 통화를 오래 했는데, 잘못된 방식으로 먹이를 주고 사진 찍으려 새들을 일부러 놀라게 해 날아오르도록 한 외지인 관광객들 때문이었다. 족히 200m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인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두루미의 성격을 알려고 들지 않는 답답한 행태였다. 삼밭의 농약 탓에 두루미 세 가족이 죽은 일도 있었다는데, 절도에 시달리던 인삼 재배 농민들이 안전한 민통선 안에 삼밭을 많이 만든 탓이었다. 멀리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월동하는 두루미가 겪는 고난은 우리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다.
이날의 답사에서 개인적으로 놀랄 일이 있었다. 정지석 목사가 운영하는 철원의 ‘국경선 평화학교’를 방문해보니 내가 1983년 말에 한 달 근무했던 월정리의 철책선 바로 그 자리였다. 군인들만 북적이던 살풍경한 철책선 방벽 앞에 이런 학교가 섰다는 점에서 35년의 큰 변화를 느꼈지만, 그만큼 오래 분단체제가 버텨왔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정 목사는 판문점 정상회담 1주년인 4월27일에 군사분계선을 따라 인간띠잇기 행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인간띠잇기는 옛 소련 붕괴 때 독립을 쟁취한 발트 3국의 경험에서 유래된 것이다. 휴전선 남쪽의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총 500㎞인데, 이를 한 사람이 1m씩 맡으면 50만명이 필요하다. 이처럼 긴 평화의 띠를 만들면 전 세계에 평화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열망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정 목사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 난항인 이유를 ‘협상 캠페인’ 특유의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이제 그 한계를 민(民)의 대중운동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날카로운 말씀이고 귀 기울일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50만명의 시민이 동시에 자기 자리를 찾아 서로 손을 맞잡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철원 동쪽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험준한 산악지형도 큰 장애물이다. 한반도 촛불시민의 잠재력을 살릴 발랄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한라산 정상에서 출정식을 하고 한반도를 종단하여 4월27일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하는 일정을 계획하고 있다. 참가인원이 적을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지만, 다른 프로그램들과 유기적으로 연결하면 큰 상징성과 파급력을 지닐 수 있다. 한라산 출정식에 이어 전국 각지에서 평화의 순례단이 제각기 행진하여 광화문광장에 같은 날 일제히 도착하여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하나됨을 위한 대규모 촛불집회에 합류하는 계획도 가능하다.
이 중에서 내 귀에까지 들리는 가장 흥분되는 아이디어는 남북의 풀뿌리 민중들이 함께하는 인간띠잇기 행사의 가능성이다. 고위급회담이나 곧 있을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면, 4월27일에 북의 인민들은 개성에서부터 판문점까지, 남의 시민들은 판문점에서 임진각, 다시 서울 광화문광장까지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를 만드는 것이다. 판문점에서 임진각, 통일로를 거쳐 광화문광장까지는 80㎞ 안팎이니 남쪽에서는 10만여명의 참가자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잘 준비해야 가능한 행사이지만, 불가능한 상상은 결코 아니다.
개성부터 판문점까지는 거리도 훨씬 짧고 북한 사회의 특성상 수만명이 인간띠를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할지 모른다. 꼭 그럴까. 지난해 9월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평양 시민 15만명 앞에서 행한 우리 대통령의 연설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감동적 장면이었다. 그 기억이 생생한 북한 인민들이 거리에 나와 개성에서 판문점, 판문점에서 서울 광화문 한복판까지 동포들의 뜨거운 맥박이 느껴지는 인간띠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스스로 인식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상호불신과 적대감을 녹이는 획기적 사건인 동시에, 체제 결속이 중요한 북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과감한 결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분단과 전쟁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인간띠의 중간중간에 멋진 공연과 전시, 흥겨운 즉석 퍼포먼스와 열띤 토론의 집회들이 꽃피어날 수 있다. 남과 북의 일부 참가자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상대방 인간띠의 일부가 되도록 허락받는다면, 2019년은 분단 극복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명환(서울대학교 교수, 영문학)
경향신문. 2019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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