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사회복지사와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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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8-29 09:43 조회36,7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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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업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는 법정 의무교육을 받는다. 인권도 교육에 포함되어 있다. 복지 현장에서 인권이 강조되는 이유도 있고, 재원을 제공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기관평가 항목에 인권교육을 포함한 이유도 있다. 정책상 좋은 방향이다.
나는 사회복지계와 직접 관련이 없지만 사회복지사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할 기회가 있었다. 관찰을 해보니 보완할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국외자로서 느낀 바를 조심스럽게 말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사회복지사에 대한 인권교육은 주로 권리침해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권리침해의 종별, 발생원인, 대처방안, 예방책 등을 가르쳤다. 덕분에 과거보다 복지 현장에서 인권침해가 많이 사라졌다. 관행, 타성, 인식 격차로 인해 발생하던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인 행동이 크게 줄었다. 인권교육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에 문제도 있다. 대상자들을 잠재적인 인권침해자로 가정한 상태에서 인권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교육을 받는 입장에서는 방어적이 되거나 위축되기 쉽다. “인권 하면 겁부터 난다, 마치 죄인이 된 듯하다”고 털어놓거나, “우리 인권은 어떻게 보호받는가”라고 반문하는 사회복지사도 있다.
인권은 좋은 것인데 일부에서나마 왜 이런 거부감이 생기는가. 사회복지사들이 인권을 반대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인권교육이 이루어지는 맥락의 차원과, 사회복지사 양성과정에서 형성된 직업적 정체성의 차원으로 나눠 생각해보자.
첫째, 맥락의 차원. 인권침해를 클라이언트가 직접 경험하는 영역에 국한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인권은 대면관계상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개념화되고, 그것은 흔히 갈등관리로 귀결된다.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느끼는 이용자의 불만과 모든 문제가 자기 책임으로 귀결되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는 복지사의 입장이 충돌하는 경우가 생긴다.
개별 사회복지사가 잘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찾는 노력은 부족하다. 복지시설 이용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자신의 인권 문제를 제기한다고 치자. 이때 그의 요구를 들어줄 궁극적 의무를 지닌 주체는 누구인가. 사회복지사인가, 시설장인가, 법인 대표인가, 아니면 공공기관인가.
복지 현장에서 해결이 어려운 인권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인권을 보호할 의무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현실에서 비롯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한국전쟁 후 민간 자선단체의 활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공적 지원이 확대되어온 것이 우리나라 복지의 역사적 특징이다.
복지시설 입장에서는 부족한 지원과 불합리한 제도가 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오로지 시설이 다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고 느낀다. 지자체가 자기들을 마치 하청업체 다루듯 한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리감독 관청에서는 서비스를 실제로 제공하는 복지기관이 당연히 이용자의 인권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원칙적 입장을 고수한다.
어느 쪽이 옳은가. 법적인 ‘형식상의 책무성’은 물론 복지법인이 져야 한다. 그러나 복지기관의 예산을 거의 전액 제공하는 공공기관엔 ‘사실상의 책무성’이 발생한다. 이 점에서 혼란이 온다. 이중적 책무성의 불명확성 때문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이 책임을 뒤집어쓰는 구도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즉 구조적인 원인은 도외시한 채 실무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문제가 되풀이된다. 불만을 제기하는 민원인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무자와 갈등을 빚기 쉽다.
공공기관이 복지시설에 대해 인권교육을 의무화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책무성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권 문제의 소지가 줄어들도록 복지시설의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복지시설 종사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빼놓을 수 없다. 시설의 종류에 따른 근무 격차도 해결해야 한다. 또한 종사자들의 노동권 문제가 클라이언트의 인권 문제보다 더 많이 제기되는 작금의 경향을 읽어야 한다. 종사자와 기관 사이에 발생하는 노동 문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재정지원 기관의 책임 범위를 더 넓혀서 고민해야 한다.
복지서비스 이용자와 시민, 공공기관, 시설장, 법인 대표, 사회복지사, 인권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스터디모임 혹은 초점집단 면접조사를 조직해보시라고 제안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을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구체적 해법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된다. 당사자들이 바탕에 깔고 있는 기본 전제를 솔직히 털어놓고 서로 다른 입장과 고충을 천천히,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련의 만남을 가져보라.
이용자의 인권과 사회복지사의 노동권을 함께 다루고, 한국 복지의 역사·구조적 특성까지 고려하면서, 좁은 의미의 문제해결식 접근이 아니라 상자 바깥에서 문제 자체를 출발점에서 새롭게 상상하는 깊은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인권에서 숙의민주주의를 실험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권 문제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 문해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인권이 몸통은 제쳐두고 깃털끼리의 갈등만 다루는 근시안적 담론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이용자 대 사회복지사 간의 갈등구도가 아니라, 이용자와 시민과 사회복지사가 연대하여 국가에 복지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구도가 형성될 때 복지 현장에서 인권이 질적으로 비약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둘째, 사회복지사의 정체성 차원. 보수교육을 통해 인권의식을 기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양성과정에서 처음부터 인권을 배우는 편이 훨씬 효과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복지학 교육과정에서 ‘실천론’이나 ‘행정론’과 같은 실무역량 과목은 전공필수지만, ‘사회복지 윤리와 철학’ 과목은 선택에 불과하다. 사회복지사 자격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점이다.
한국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은 “사회복지사는 인본주의·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한다. 특히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정의와 평등·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선다”고 해놓았다. 또한 “사회복지사는 인권존중과 인간평등을 위해 헌신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고 대변하는 일을 주도해야 한다.” 이렇게 훌륭한 강령을 만들어놓고 왜 그것을 학생 때부터 확실히 가르치지 않는가.
국제사회복지사연맹(IFSW)은 지난달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대의원 총회에서 윤리원칙 선언을 개정하여 발표했다. 여기서도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 인권, 사회정의를 제일 먼저 강조한다. 만일 사회복지사들이 윤리강령을 철저히 배웠더라면 인권에 대해 방어적이 되거나 피해의식을 갖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세계인권선언에서 사회권의 백미로 꼽히는 25조 1항을 들려주곤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에는 음식, 입을 옷, 주거, 의료,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사회서비스 등을 누릴 권리가 포함된다. 또한 실업 상태에 놓였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장애가 있거나,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그 밖에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살기가 어려워진 모든 사람은 사회나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이런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는 자신이 사회권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인권전문가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마땅하다. 사회복지사 교육에서도 복지가 곧 인권의 실현이라는 가치를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사회복지사협회는 권익단체로서 회원의 처우 개선뿐만 아니라, 전문단체로서 직업윤리를 지키는 보루의 구실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길게 보아 사회복지사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한겨레, 2018년 8월 29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9632.html#csidx1f2ab1f732746e1bbeb33dc49739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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