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교육마피아’ 일소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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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5-14 14:44 조회41,5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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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탄생시킨 새 정부이지만, 수구세력이 짓밟은 헌정질서를 되살리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공익보다 사익에 집착하는 자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건재하기 때문이다. 공무원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극소수의 적극 가담자가 아니더라도 공무원들은 상명하복의 명분 아래 권력의 수족 노릇을 합리화하는 관성에 익숙하다. 지금 공무원 사회는 실력 있고 양심적인 개혁파와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수구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전자가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두 사건은 비리사학과 유착관계인 일부 관료, 즉 ‘교육마피아’가 여전함을 보여준다. 첫째는 교육부가 작년 말부터 운영한 사학혁신추진단에 접수된 비리사학 제보 내용이 제보자 신원과 함께 수원대 등 해당 비리사학에 유출된 사건이고, 둘째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동국대 한태식 총장(보광 스님)의 연구부정 의혹에 대해 보여준 몰상식한 대응이다.
교육부는 비리사학 제보 내용을 빼돌린 서기관을 직위해제하고 중앙징계위원회에 중징계를 요청하는 동시에 경찰 수사를 의뢰했다. 당연한 조치이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비리사학의 횡포에 큰 고통을 당해온 대학 구성원들이 용기를 낸 제보는 100건이 훨씬 넘는다. 교육부는 비리사학과 싸우는 교직원과 학생들을 속여 함정에 빠뜨린 것과 다름없으며, 수많은 비리사학에 대한 추가 제보나 정상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조직을 혁신해야 하며, 어정쩡한 후속조치로 봉합해서는 곤란하다.
동국대 한태식 총장의 논문 표절은 이미 2015년 총장 취임 전부터 학내 갈등으로 번져 학생회 간부가 50여일의 단식까지 한 사안이다. 대학 자체 조사에서 18건의 표절이 인정되었지만, 이사회가 이를 무시하고 총장으로 임명한 후 재조사에서 표절 판정이 뒤집혔다. 당시 박근혜 정권의 교육부는 이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그러나 작년에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HK)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나온 한 총장 논문의 부정 의혹이 다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지난해 11월13일 연구재단이 내린 판정은 눈을 의심할 만하다. 판정문은 서산대사의 정토관을 다룬 2013년 논문이 백과사전을 4쪽(!) 정도 인용 표시 없이 사용한 의혹에 대해 당시 “교육부의 지침, 피조사자 소속기관의 규정·지침 및 불교학(연구)계의 규정·지침에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적용 기준이 없었”다고 말한다. 남의 글을 적절한 인용 절차 없이 베끼면 잘못이라는 연구윤리의 상식으로는 불충분하고, 백과사전을 베끼지 말라는 친절한 명문 규정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헛웃음이 나오지만, 어쨌든 백과사전 표절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뒤이은 내용도 가관이다. “5개 불교학회의 전·현직 학회장 또는 편집위원장 등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1개 학회만 표절을 인정했고 나머지 4개 학회 관계자는 백과사전을 “인용표시 없이 인용한 행위에 대하여 당시에는 이를 제재할 수 있는 기준이 부재”하여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연구재단이 자문을 구했다는 불교학회 임원들의 의견, 즉 2013년의 연구윤리규정에 해당 기준이 없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2005년 황우석 사건 이후 각 대학과 학회는 연구윤리규정을 만들고 관련 위원회를 설치했으며, 관련 정책은 계속 강화되어왔다.
“다수 불교학계의 통상적인 판단기준”에 따라 한 총장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함으로써 연구재단은 불교학계의 명예를 싸잡아 훼손했으며, 이 수상한 학회들 및 회의록의 정보 공개도 거부했다. 또 해당 논문이 한 총장이 일본어로 발표한 논문의 8쪽가량을 다시 가져다 쓴 중복게재 의혹도 명문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면죄부를 주고 있으니, 이 또한 사실상 중복게재를 인정한 셈이다.
연구재단은 연구윤리의 기본조차 무시했다. 일반 범죄와 달리 연구부정에는 시효가 없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연구에서 일정한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연구부정 여부를 판정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주장이 과학적 연구 결과로 통용되어 후대의 연구나 교육에 막대한 폐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까지 해외 사례를 인용하자니 참담한 심정이지만, 이웃나라 일본은 20, 30년 전 논문도 연구부정으로 판정되면 논문을 철회한다. (후략)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8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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