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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기본소득보다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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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8-08 13:18 조회35,7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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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일군의 유럽과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이탈리아 파도바라는 도시에 모여 ‘가사노동에 임금을!’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조직했다. 이들은 다음 세대 노동자들을 낳아 기를 뿐 아니라 현세대 노동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는 여성들에게 국가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또한 임금노동자가 아닌 여성도 가정이라는 일터의 노동자이며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연대하고 파업하면서 투쟁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투쟁은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1970년대가 바로 복지가 삭감되고 빈곤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 신자유주의가 발호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정부와 언론은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사회에 기생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을 유포했다. 손자녀를 돌보는 여성노인들이나 다자녀 유색인 여성들은 현실에서 하루 종일 어떤 일이든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고 있다고 간주됐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여성들의 투쟁은 여성들이 임금을 받지 않고 수행해온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고, 남성들이 벌어오는 임금에 의존해 가정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던 삶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이 당대에 큰 성공을 이뤘다고 보기는 어렵다. 좌파조차도 여성의 가사노동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상당히 큰 규모의 운동이었음에도 이 운동은 곧 잊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부모 양육수당 지급이나 전업주부의 경제적 기여 인정 등 당시 운동이 주장했던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제도화됐다. 남성의 임금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므로 당연히 여성보다 많아야 한다는 관행도 무너져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보다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가사노동에 임금을!’ 운동이 다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최근 들어 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면서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투쟁은 기본소득 논의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임금노동에 종사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적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소득을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양측이 유사하다. 하지만 ‘가사노동에 임금을!’ 운동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기준 자체에 저항했다. 사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 아픈 이웃을 돌보는 일은 물론이고 종종 손해만 보는 농사일 역시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는 어렵다. (후략)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양학과 교수

(농민신문. 2018년 8월 8일)

원문보기 : https://www.nongmin.com/opinion/OPP/SWE/FRE/296149/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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