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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중단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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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2-11 15:05 조회39,2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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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회개나 회심으로 번역되는 ‘메타노이아(metanoia)’는 철학에서는 대상에 대한 탐구에서 맥락에 대한 물음으로의 관점 변화를 뜻한다고 한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코뮤니스트 후기(後記)’(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는 언어의 창의적이고 전복적인 사용으로 가득 찬 책이지만, 저자는 이 말도 독특하게 전유하면서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대한 기발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붕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공산당 지도부의 메타노이아적 결정으로 일어난 평화적인 자기 폐지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곡예에 가까운 논리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이러한 주장(농담?)이 반드시 황당무계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인데, 유행하는 급진적 비판 이론들이 ‘차이의 무한 작동’이나 ‘무한한 혼종성’과 같은 실체화되기 어려운 이상주의 안에서 공회전하고 있다는 저자의 논지에 분명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무한성에 맞서 어느 시점에서는 중단이나 종결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은 이상하게 신선하다.

 

저자는 예술의 실천을 예로 든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사물들이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 방식이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는 그 어떤 ‘객관적’ 근거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천의 행위에서 본질적인 것은 어느 시점에선가 종결을 지을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점, 즉 예술 작품 만들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마감에 쫓겨서일 수도 있고, 돈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보리스에 따르면 “계속한다면 작품의 역설적 성격이 상실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술적 실천의 중단 가능성 없이는 그 어떤 예술도 존재할 수 없다.” 작품의 역설적 성격? 내가 이해하기에 이 말은 세상의 테제와 안티테제, 그러니까 모순의 양측면을 동시에 사유하고 표현하고자 하는(이것이 아니라면 누가 예술을 하겠는가?) 예술의 무모함과 관계 있는 것 같다. 언어로 치면 역설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가리켜지는 자리 말이다. 생각해보자. 소설은, 시는, 영화는 어디서 어떻게 끝나는가. 혹은 어떻게 끝나야 하는가. 온갖 사후적 비평과 검토가 가능하겠지만 창작 주체의 자리에서라면 단 한 가지 대답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아서요.” (후략)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국일보, 2018년 2월 8일)

 

원문보기: http://www.hankookilbo.com/v/eb333bbfea7b41bf9226e93c42b985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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