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비엔나 인권체제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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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6-11 11:45 조회37,6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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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인권운동은 비엔나 93 인권체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비엔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난 주말에 열린 한국인권학회의 학술대회에서 1993년 비엔나(빈) 세계인권대회 25주년을 기념하는 세션이 마련되었다. 당시 비엔나 대회에 참가했던 한 인권운동가의 회상이다.
“비엔나 이전의 인권운동은 한마디로 ‘대정부 투쟁’이었어요. 비엔나 대회에서 전세계 다양한 인권운동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지요. 마치 우물 안에 있다 갑자기 큰 바다를 바라보게 됐다고나 할까….” 1970년대 초 인권 명칭을 쓰는 단체들이 생겨난 뒤 1990년 초까지가 인권운동의 1세대였다면, 비엔나 대회 이후 지금까지는 본격적으로 분화·발전한 2세대 인권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다.
이렇게 중요한 전기가 된 비엔나 세계인권대회가 무엇이었나. 유엔이 소집하여 1993년 6월 하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렸던 대규모 공식 국제인권대회를 말한다. 171개국 정부 대표와 수백개 엔지오, 수천명의 활동가와 전문가들이 참여했던 포럼이었다. 대회는 ‘비엔나선언 및 행동프로그램’이라는 최종 문헌을 채택했다. 유엔인권최고대표실과 국가인권기구 등 인권 실행을 위한 제도화, 그리고 여성 인권, 원주민 인권,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 민족·종교적 배타주의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이들은 대부분 그 후 인권운동에서 구체화되었다.
세계인권대회가 열린 가장 큰 계기는 냉전의 종식과 관련 있었다. 냉전 중 인권은 동서 진영의 이데올로기 대결 와중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였다. 미국은 자유권만 진정한 인권이라고 주장했고, 자본주의권의 인권을 비판하는 단체에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대변자라는 색깔을 씌웠다. 소련은 소련대로 사회권만 강조하면서, 공산주의권의 인권을 비판하는 단체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앞잡이라고 몰아세웠다.
이러한 이념적 양극화가 막을 내리면서 인권이 그 본래적 총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국제정치 환경이 마련된 것이 대회 소집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비엔나선언은 사회권이든 자유권이든 모든 인권은 서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고(불가분), 모든 권리들이 서로 기대어 있으며(상호의존), 모든 권리들이 서로 연결된다(상호연관)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한 민주주의, 발전, 인권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자유로서의 발전’ 원칙도 이때 나왔다.
문민정부 시대를 맞았던 한국 인권운동은 비엔나 대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유엔세계인권대회를 위한 민간단체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홍성우 변호사가 상임대표, 천정배 변호사가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조용환 변호사의 사무실이 공대위 사무실 역할을 했다. 참가단체로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ILO) 전국노동자공대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있었다. 참관단체로는 민족사진연구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있었다. 단체 리스트에서 한국 인권운동의 어제와 오늘 사이의 차이와 변화상이 느껴질 것이다.
비엔나 대회는 인권의 보편성 논쟁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대회 전 아프리카의 튀니스(튀니지), 라틴아메리카의 산호세(코스타리카), 아시아의 방콕(타이)에서 지역별 준비모임이 소집되었다. 그런데 방콕 모임에서 각국 대표들이 ‘방콕선언’을 발표해 버렸다. 선언은 세계인권선언 이래의 정통 인권관을 재확인하면서도 국가주권과 내정간섭 반대를 강조했고, 인권이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각국 및 지역적 특성과 역사·문화·종교의 배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아시아적 가치논쟁’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방콕선언은 그 내용만큼이나 선언을 추진한 주체들의 정치적 동기가 입방아에 올랐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등 권위주의적 발전 모델을 추구하던 나라들이 자신의 정치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운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방콕선언의 주장을 비엔나 대회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큰 관심사로 등장했다. 결국 비엔나선언은 방콕선언을 껴안으면서도 그것을 물구나무세우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즉, 비엔나선언은 각국 및 지역적 특성과 역사·문화·종교의 배경이 중요하긴 하나,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시스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증진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비엔나선언은 인권 상대주의에 맞선 인권 보편성의 주류 담론에 판정승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권의 보편성 논쟁은 그 후 약간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비엔나 이전에 보수파가 아시아적 가치론으로 인권 보편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면, 비엔나 이후에 일부 진보파가 탈식민이론으로 인권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거울 이미지와 같은 사례를 살펴보자. 아랍계 후손으로서 프랑스 소르본대학의 총학생회장인 마리암 푸제투라는 여학생이 히잡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도대체 68 학생혁명의 진원지에서 어떻게 세속주의적 보편성 원칙을 반대하는 처신을 할 수 있느냐는 비판을 받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란 이슬람혁명 가문 출신의 마시 알리네자드라는 여성이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조국을 떠나 영국에서 자신의 두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뉴스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어느 쪽 주장이 인권의 보편성 원칙에 부합하는가. 요즘엔 자신의 개별적 선택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다시 말해 특수한 예외성을 행사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 인권의 보편성에 더 가깝다는 해석이 많이 나오는 추세다. 단일 기준을 예외 없이 적용하는 것만이 인권 보편성은 아니라는 식으로 보편성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비엔나선언이 세계 인권 발전에 큰 획을 그었지만 부족한 점도 많다. 선언치고 대단히 긴 문헌인데도 지난 25년간 인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거시적 요인들을 다루지 않은 건 결정적인 오류다. 예를 들어, 생태, 세계화(지구화), 신자유주의, 불평등과 같은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비엔나선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전통적 인권담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권을 나무와 가지로만 파악하고, 전체 숲으로 보는 눈이 부족한 것이다. 내가 누누이 지적해 왔듯 인권이 전문적 권리체계로만 치달으면 거시적 사회변동과 분리된 미시적 개입 테크닉으로 왜소화할 위험이 커진다.
올해 비엔나+25라는 이름으로 열린 국제포럼의 주제는 불평등과 안보였다. 그러나 사반세기 동안 무얼 하다 이제야 뒷북을 치는가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작금에 인권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극히 열악해졌는데 법제화를 최고선으로 간주해온 인권담론의 책임도 없지 않다. 최근 비엔나 대회를 기념하면서 후세인 유엔인권최고대표는 인권이 전세계적으로 우선순위(priority)가 아니라 추방천민(pariah)의 신세가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비엔나 인권체제가 인권운동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우선, 냉전 잔재가 한반도에서 해체된다면 우리 인권 상황은 마치 전세계가 냉전 후 비엔나선언에서 다짐한 것과 같이 자유권과 사회권의 통합을 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용이하게 분배와 복지와 사회권을 논할 수도 있다. 또한 비엔나 후 부각된 인권 이슈들―여성, 외국인 혐오, 증오, 선동 등―이 우리 사회에서도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지난 주말의 학술대회에서 충남인권조례 폐지에 대한 논의도 나왔다. 은우근 교수는 지금까지 극우 반공주의 즉 이데올로기가 반인권의 주요 원천이었다면 앞으로는 종교와 결합된 극우 차별주의가 그것을 대체할 것이라는 지적을 했다. 비엔나적 문제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가질 필요가 여기에 있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한겨레, 2018년 6월 5일)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7813.html#csidx0bd01ca4c495a63a5d50ed94bcc3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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