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임정’의 시선으로 용산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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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9-10 16:53 조회35,0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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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성찰과 전망’의 기획들이 학계, 종교계, 언론 등 여러 방면에서 진행 중이다. 지난 8월30일자 경향신문이 시작한 ‘임정 대가족 유랑의 3년’도 그런 기획의 하나일 것이다.
19세기 말의 동학농민전쟁부터 3·1운동, 4·19민주혁명,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을 거쳐 오늘의 촛불혁명에 이르는 우리 혁명운동의 역사 가운데서도 유독 3·1운동이 결정적 의의를 갖는 까닭은 이 모든 운동들의 중심목표가 여기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3·1운동은 일제 식민지배를 철폐하는 것만 목적으로 삼은 단순한 독립투쟁이 아니라 봉건적 왕조체제의 극복을 지향하는 근대적 공화주의 운동의 일환이었고, 상층 지도자들이 주도한 엘리트 운동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사회구성원이 대거 참여한 대중적 시민운동이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1910)이나 한용운 선생의 ‘조선독립이유서’(1919) 같은 논설에서 드러나듯 이 시대의 우리 민족운동은 하나의 사상운동이기도 했으니, 거기에는 민족주의의 폐쇄성을 넘어선 국제적 평화체제 구상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공화제’를 임시헌장 제1조로 하여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는 3·1운동의 위대한 역사적 성과라고 볼 만하다.
그런데 알다시피 임정의 앞길은 순탄치 못했다. 수많은 위험과 장애요소들이 밖에서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임정의 발목을 잡았다. 더욱이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에는 상하이를 점령한 일제의 마수가 임정의 목을 졸랐다. 안창호 선생은 왜경에 체포되었고 임정 요인들은 프랑스 조계를 도망치듯 급히 떠나야 했던 것이다. 고달픈 피란의 발걸음은 항저우(1932), 전장(1935), 난징(1937),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을 거쳐 1940년 마침내 충칭에 이르렀다. ‘조선의 잔 다르크’로 불린 정정화 선생(1900~1991)은 후일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장장 5천킬로미터의 피난길은 중공군이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쫓겨간 만리장정에 견주어질 만한 것이었고, 사실 우리끼리도 이 피난행각을 만리장정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말 못할 고난 속에서도 1945년 8·15 그날까지 임정의 법통을 지켜낸 것은 기적이라면 기적인 셈이다.
정정화는 동농 김가진(1846~1922)의 며느리이자 현재 임정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자동의 모친으로서, 3·1운동 직후 시아버지와 남편이 망명하자 1920년 1월 뒤따라 국경을 넘었고, 임정의 안살림을 맡아 어른들을 보살피는 가운데서도 1930년까지 여섯 차례나 국내로 잠입하여 운동자금을 얻어오는 등 모험을 감행한 분이다. 임정의 역사를 증언하는 공식 기록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몇 해 전 <장강일기>를 읽고 감동하여 칼럼(다산포럼 2013·1)을 쓴 적도 있는데, 그 칼럼에서 내가 특히 관심을 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아니라 이름을 남기지 못한 평범한 서민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 다른 하나는 목숨을 바치는 것조차 마다 않고 투쟁했던 분들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장강일기>는 임정에 관한 심층사(深層史)이자 미시사(微視史)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길게 소개할 여유가 없으므로 두 번째 문제에 관한 <장강일기>의 증언만 다시 살펴보자. 알다시피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임정 요인들의 귀국은 쉽지 않았다. 1945년 10월이 되어서야 항공편을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통보가 왔고, 그나마도 개인 자격으로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의 귀국은 더 어려웠다. 1946년 1월16일에야 정정화를 비롯한 100여명 가족들은 6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충칭을 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군 수송함으로 상하이를 떠난 것은 5월9일이었고, 부산항에 내린 것은 엿새 뒤였다. 그런 다음 5월15일 오후 부산역을 출발한 기차는 이틀 뒤인 17일 저녁 8시쯤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들이 당한 푸대접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가령 서울행 기차 안에서의 일을 <장강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기차가 설 적마다 화물칸으로 기어 올라와 설쳐대는 경찰관들이었다. 아무에게나 반말 짓거리로 대하고 위세를 부리는 꼴이 꼭 왜정 때의 경찰을 그대로 뽑아다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것은 극히 사소한 일화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소한 것들 뒤에는 반드시 중대한 것과의 연결고리가 있게 마련이다. 조국광복에 일생을 바친 투사들 다수가 명색이 해방된 조국의 남과 북에서 존경과 명예를 누리기는커녕 암살되거나 박해받은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아마 대표적인 사례는 의열단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불굴의 전사 김원봉 선생(1898~1958)일 것이다. 그는 남에서는 악질경찰 노덕술에게 잡혀가 따귀를 맞는 모욕을 당했고 북에서는 종파주의자의 이름으로 숙청되었다지 않은가.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이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어디에 묻혀 있고 국립묘지인 현충원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묻혀 있는지 생각해 보면 역사왜곡의 실상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18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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