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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예술은 예술가의 것인가 대중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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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10-10 11:28 조회36,8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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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9일 오후,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음식점 옥류관을 나선 우리 일행은 평양교원대학을 거쳐 ‘만수대창작사’로 안내를 받았다. 뒤늦게 알았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보다 조금 앞서 만수대를 관람하고 있었다. 사실 점심때까지는 모든 촉각이 어제 오후와 오늘 오전에 연속되는 정상회담의 성과 여부에 쏠려 있었으므로 아무리 이름난 옥류관이라 하더라도 ‘랭면’맛 같은 건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좋은 소식과 함께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양 정상이 합의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문건도 배포되었다. 우리의 가슴은 안도와 희망으로 고양되었고, 안내원을 따라가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만수대창작사는 조선화(한국화), 유화(서양화), 수예, 공예, 조각, 동상, 벽화, 산업미술 등 10여개 분야의 미술작품 제작을 총괄하는 단체의 명칭이자 그 단체의 구성원들이 작업하는 전체 공간의 이름이다. 7만㎡의 대지에 세워진 연건평 4만㎡의 건물들 속에서 약 1000여명의 미술가와 2000여명의 종사원이 60여개의 창작실에서 10~20명 단위로 모여 집체창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남쪽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장에서 대충 보기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국가가 제공한 좋은 환경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발길은 조선화 창작실에 이르렀다. 전람회를 자주 가본 것은 아니지만, 남쪽 미술에서도 과거 동양화라 불렀고 요즘은 한국화라 더 많이 부르는 그림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점점 더 서양화와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점이 감지되었다. 우리들 앞에서는 50대의 중년 화가가 열심히 붓을 들어 화폭에 칠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진짜 창작의 붓질이라기보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보여주는 시연(試演)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말을 걸자 그는 손을 멈추고 북녘 사투리로 성의껏 대답을 했다.


“지금 그리시는 게 상상인가요, 아니면 어떤 대상이 있습니까?”


“당연히 대상이 있습네다. 먼저 현지에 가서 스케치하고 사진도 찍고 합네다.”


“그럼 저 그림은 어디를 그린 건가요?”


“황해도 재령에 만수산이라고 있습네다. 금강산이 동쪽의 왕자라면 만수산은 서쪽 여왕이야요. 금강산처럼 유명하진 않습네다만….”


“실제의 모습 그대로 그립니까?”


“아니디요! 더 효과를 내기 위해선 적절하게 변형을 시킵네다. 창의가 들어가야디요.”


“그렇게 변형을 시키는 까닭이 무업니까?”


“우리 예술가들은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복종합네다!”


그의 단호한 대답이 번쩍 내 머리를 쳤다. 기왕이면 자리에 앉아 이 화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다음 더 자유로운 토론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런 자유가 그에게 있는지 따져볼 틈도 없이 일행은 벌써 딴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중요한 화두 하나를 선사받은 데 대해 속으로만 감사하면서 나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그의 발언은 예술가의 사회적 존재방식에 관한 ‘하나의’ 오랜 견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만수대창작사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인민예술가·공훈예술가 등 등급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급여를 보장받는 대신 일정한 분량의 창작을 생산해야 한다.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4·15문학창작단’ 소속의 문인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비슷한 의무를 수행할 것이고, 음악이나 무용 분야의 예술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사회의 관습에 젖어 살아온 우리의 편견과 달리 역사적으로 결코 예외적이거나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조선시대 화가들도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선발되어 급료를 받는 것이 가장 유력한 생계 보장책이었고, 유럽에서도 근대 초기까지는 다수의 예술가들이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어야만 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다. 극작가 레싱이나 작곡가 모차르트는 그들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선입견과 달리 영주나 대주교 등 지배계급의 압력에서 벗어난 시민적 예술가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생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극소수의 스타들은 부(富)를 누리는 반면 대부분의 예술노동자들은 생존의 벼랑에 몰리다 못해 자살에 이르기도 하는 사례를 떠올리면 이때의 자유라는 것이 한갓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만난 화가는 국가의 예술정책 또는 지도자의 국정철학에 따른다고 하는 대신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예술가라면 으레 입에 올리는 관용적 문구(클리셰)로 그가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당의 방침을 자기 나름으로 소화하여 개인적 신념의 언어로 표현한 것인지 나로서는 물론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의 발언이 북한 예술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예술관일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이고, 또한 그것은 개인주의·자유주의에 젖어 살아온 평범한 남한 사람의 예상범위 안에 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추론을 더 밀고 나가면 그의 발언이 북한체제의 자기규정으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근본성격에도 불가피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자연히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현실적 숙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18년 10월 8일)

 

원문 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0082050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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