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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유엔에서 한반도를 염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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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5-09 10:50 조회42,3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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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엔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다녀왔다. 유엔 공보국과 유네스코가 공동 주최한 연례 세계시민교육 국제 세미나 자리였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70돌을 기념하여 올해의 주제를 세계인권선언과 세계시민교육으로 정했다고 한다. 나는 기조연설을 하고 패널토론에도 참여했다. 세계시민교육에 대해 견식을 넓힐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세계시민교육은 유네스코가 발전시키고 있는 현재진행형 개념으로서, 정확히 말하면 전지구적 시티즌십 교육(GCED)이다. 우리가 자신이 속한 나라와 지역을 초월하여 더 큰 인류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갖는 것이 전지구적 시티즌십의 핵심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전통적인 귀속성을 무시할 순 없다. 따라서 전지구적 시티즌십은 단순한 세계주의가 아니라 지역사회, 국가, 그리고 전세계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런 원칙은 인권의 기본정신과도 부합된다. 인권은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 풀뿌리 차원에서부터 국가 차원, 더 나아가 전세계 차원에서 모두 통용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권을 한국 사회 내의 문제에 국한해서 생각하기 쉽다. 흔히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권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권을 원래 의미대로 사용한다면 국내의 인권 문제에 대해 우리가 불의감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로힝야족, 시리아 난민, 콩고 내전 희생자에 대해 똑같이 불의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실천하기 어렵더라도 적어도 인권을 이야기할 때엔 의식적으로 이런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세계시민교육의 취지는 인권과 결이 같다.


현재 유엔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의 세부목표 4.7에 세계시민교육이 포함되어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2030년까지 모든 학습자들이 지속가능발전 및 지속가능한 생활방식, 인권, 젠더 평등, 평화와 비폭력 문화 증진, 세계시민의식, 문화 다양성 및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문화의 기여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기조강연에서 나는 인권교육이 세계시민교육-지속가능발전목표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내용상 풍부한 어떤 새로운 담론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유엔 회의와 남북한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시점이 겹쳤다. 행사 후 여러 사람들이 다가와 축하와 덕담을 해주었다. 저녁식사 때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두 정상이 조우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뜨거운 느낌이 가슴에서 올라왔지만 겉으로 평정을 가장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감격 때문인지 시차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 밤을 꼬박 새워 현지 신문들을 읽고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동아시아에서 전해져 오는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래 내용은 이번 회의를 통해 배운 점들과 미국 조야의 분위기를 접하고 느낀 바를 한반도에 적용시켜 두서없이 메모해 본 것이다.


첫째, 북한의 개혁·개방의 방향에 관하여. 통상적인 경제개발의 논리, 구시대적 성장논리가 전체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북한의 엄청난 자연자원, 저임의 질 좋은 노동력… 이런 식의 보도가 홍수를 이루지만 정작 지속가능발전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개발이 크게 지체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부터 21세기형 지속가능발전 모델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탈화석연료형 신재생에너지 경제, 4차 산업혁명, 경제-사회-환경의 통합적 플랜이 가능한 곳이 바로 북한이 아닐까 한다.


지난주 이 지면(5월3일치 ‘야! 한국사회’ 칼럼 ‘북한을 향한 동상이몽’)에서 김성경 교수가 통렬히 지적한 것처럼 사람·환경·공동체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는 천박한 자본가들이 더 이상 착취할 것조차 없어진 한국 땅을 벗어나 그다음 먹잇감으로 북한을 상상하고 있지나 않은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만일 북한 당국 스스로도 통상적 경제개발을 상정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새로운 발전모델을 설파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성장기를 보낸 스위스가 현재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가장 빨리 달성하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를 설득하면 어떨까. 한반도에서 동방의 스위스를 건설해 보라고 말이다.


둘째, 북한 인권에 관하여. 자칫 인권 이슈가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가로막는 돌부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리 있는 견해다. 냉전 현상유지 세력들이 인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차단해야 한다. 또한 이제 겨우 대화가 시작된 단계에서 공식적으로 인권을 거론하기 어려울 거라는 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길게 보아 국제사회에서 인권 이슈가 어떻게 다뤄질지 고려해야 한다. 인권이 평화의 돌부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북한 인권에 대한 장기적 대비를 세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화-발전-인권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서 사고하고,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길을 닦으려면 인권이라는 토대가 깔려야 한다는 기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인권 문제에 방어적으로 대처하거나, 남북관계가 개선되기만 하면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국제 동향을 오독하는 것이 된다. 풍계리 실험장 폐기가 비핵화의 가시적 상징인 것처럼, 정치범 수용소 폐쇄가 체제 보장의 실질적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북한을 독려해야 한다.


북한의 발전을 위해 언젠가는 개입할 수밖에 없는 세계은행이 다당제 민주주의 거버넌스를 강조하고 있는 사실, 아시아개발은행도 인권 압력을 받고 있는 현실, 세계무역기구조차 노동권과 노동조건을 중시하는 추세, 경제 분야에서도 인권을 핵심 가치로 간주하는 유럽연합 등을 방정식에 넣어 생각해야 한다.


셋째, 북한에 대해 미온적인 미국 내 여론에 관하여. 트럼프의 적극적 행보와는 달리 미국의 여론 주도층, 심지어 진보 진영조차 북한의 변화를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많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야 어떻든 변치 않을 사실이 있다. 트럼프 이후에도 한반도 평화가 유지되어야 하고, 미국은 여론의 나라라는 점이다. 트럼프만 바라볼 게 아니라 미국 전체를 상대로 홍보전을 펼쳐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우리 정부가 직접 하기 어렵다면 입법부라도 나서야 한다. 초당적 의원외교는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것이다. 당장 국회의장과 정당 대표들이 미국으로 달려가 공화당, 특히 민주당 의원들을 만나고, 뉴욕 외교협회나 조지타운대학에서 연설을 해야 한다. 그들은 주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질 것이다. ①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태도변화가 이번에는 믿을 수 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인가. ② 북한의 변화를 위해 남한이 어느 정도나 경제적·정치적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는가. ③ 경제적으로 일부 개방할지 몰라도 여전히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는 나라를 미국이 왜 정상국가로 상대해 주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미국의 국익과 민주주의 논리를 함께 아우르는 답변을 준비해 가야 한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영구적이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평화와 번영’(PVIPP)이 미국을 포함한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고 당당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


넷째, 유럽과의 관계에 관하여. 대북 제재를 푸는 문제는 결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달려 있으므로 영국, 프랑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까지 두고 있지 않은가. 이들에 더해 독일과 브뤼셀까지 합친 콰르텟(사중주단)에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외교적인 우군으로 확실히 붙들어야 한다. 특히 유럽은 핵시설의 감시·검증, 군축에 관해 세계 최고의 평가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향후 이들의 역할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한겨레신문, 2018년 5월 8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3754.html#csidxce9bac42c267f9ab491208ef181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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